5/27/2020

시칠리아 여행: 05: 팔레르모: 트라파니 가는 길



[via pignatelli aragona. 길 끝 붉은 지붕이 마씨모 극장]

[폴리테아마 광장 트라파니 행 버스 매표소와 정류장. (구글 지도)]


숙소를 나오면 아라고나 거리via pignatelli aragona. ciao, aragona! 어느새 우리 동네 같은 이 길에도 작별을 고한다. 베르디 광장을 지나 루제로 세티모 거리를 따라 폴리테아마 광장까지... 부지런히 씩씩(?)하게 행진... 마음 상태가 긴장에서 비장으로 바뀐 듯하다. ^^


[세제스타 매표소 및 버스 정류장과 트라파니 행 티켓]


세제스타segesta 버스회사 매표소. 내 앞에 서너 명밖에 없었는데 표 사는데 15분이 걸렸다. 음… 예상한 일이다. 요금은 8.6유로. 

가족, 연인, 여행자, 연인을 배웅하러 나온 남자 등등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은 꽤 많다. 자리가 꽉 찰 것 같다.

기껏 해봐야 한 시간 남짓 떨어진 트라파니 가는 길인데 배웅 나온 사람들과 애틋하게 작별인사를 나누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기 좋으면서도 낯설다. 내 마음에도 저런 애틋함이 처음부터 없지는 않았다. 언제 어떻게 잃어버렸을까... 나도 모르는 사이 쿨하고 시크한 사람이 돼버렸다.^^ 남들이 아무리 좋아 보여도 나는 나대로 사는 걸로...



[폴리테아마 광장 근처 리버티 스타일]


광장 주변에는 팔레르모 다른 곳에 비하면 높은 건물들이 있지만 고층건물이라고 할 수는 없다. 마시모 극장 북쪽 이 일대는 비교적 최근에 개발된 신도시라고 한다. 그래도 19세기 말에 형성됐다고 하니 100년은 넘었다. 우리나라 1대 신도시도 40년이 되어가니 100년 금방 간다. ^^ 아무튼 그래서 당시 유행하던 아르누보, 이곳 이름으로는 리버티 스타일 건물들이 많다고 하는데, 광장 주변에서도 종종 눈에 띈다.

버스가 왔고, 사람들을 따라 짐칸에 배낭을 싣고 버스에 올랐다. 얼마 만에 타보는 고속버스인지. 산과 들 사이로 버스가 빠져나간다. 산은 어릴 적 식목일을 전후로 많이 듣던 단어, 민둥산. 엄청 건조해 보인다. 식목일 노래를 알려주고 싶다. (메아리가) 벌거벗은 붉은 산에 살 수 없어 갔다오, 산에 산에 산에다 나무를 심자~~ 팔레르모는 산으로 에워싸이고 바다와 접한 황금의 계곡conca d’oro이라고 불리는 넓은 분지에 자리잡은 도시다. 위성 사진을 보면 약간 하현달 모양이다. 그런데 산에 나무는 별로 없는 듯 울창한 산을 아직 못 봤다.





시내를 벗어나 바닷가를 따라 간다. 왼쪽은 산, 오른쪽은 바다. 매일 집에만 있는 사람에게 어떤 풍경인들 새롭지 않으랴마는, 이것이 시칠리아의 풍경인가 보다. 새롭다. 속으로 감탄사를 연발한다. 인가나 산업시설을 보면 여유로워 보이지 않지만 자연은 너무 아름답다. 호수처럼 보이는 바다, 구릉 지대에 열과 오를 맞춰 심어진 포도나무, 뭉쳐 굴러다니는 먼지 모양으로 여기저기 툭툭 던져져 있는 것 같은 올리브 나무 뭉치, 색조가 그라데이션을 이루는 구릉 지대 밭들. 몇 날 며칠을 봐도 질릴 것 같지 않을 풍경이다. 아무리 셔터를 눌러 봐도 카메라에 담기는 풍경은 그저 pathetic. 언덕 위에 홀로 서있는 빈 집들. 지붕도 벽도 없이 골격만 남은 집도 있다. 수리해서 살겠다면 빌려줄까? 수도, 전기는 들어올까? 수세식 화장실 없으면 못 사는데 라며 김칫국을 마셔보기도 하고... 산 위에 구름이 걸려있다. 유칼립투스 나무도 고속도로 가에서 자주 보인다.

유칼립투스 나무에 대한 첫 추억은 산티아고 길을 걷다 만난 향기로운 갈리시아의 숲이었다. 그 다음 기억은 아디스아바바에서... 작은 여자들이 자기 몸체보다 더 큰 유칼립투스 나뭇짐을 지고 비탈길을 내려갔었다. 이제 트라파니 가는 길도 떠오를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이 나무에 대해 말로만 들었을 때는 왠지 신비했다. 이름도 멋있고 코알라의 먹이가 된다고도 하고, 유칼립투스 향이라는 향도 좋았다. 그런데 여러 번 보다 보니 수형도 예쁘지 않고 예전에 느끼던 신비감이 다 사라졌다. 그저 아카시아 나무 보는 느낌이랄까... 신비감은 사라졌어도 향은 여전히 좋다. 향이 이 나무의 보석이지 싶다. 

어떤 존재든 자신만의 보석 하나는 지니고 있지 않을까? 아름다운 세상을 살려면 그걸 알아보는 안목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