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1/2020

시칠리아 여행: 05: 트라파니: 저녁 식사 & 길었던 하루를 마치며



저녁 식사


젤라또로 급한 불은 껐지만 곧 더 큰 허기가 밀려왔다. 지금 시각은 평소 저녁 시간에 비하면 너무 늦은 시간이지만, 이곳 기준으로는 너무 이른 시간이라 문을 연 레스토랑이 별로 없다.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거리에 누가 봐도 관광객 대상 식당으로 보이는 곳이 문을 열었길래 들어가서 물어보니 식사가 가능하단다. 맛집이고 뭐고 그런 걸 따질 형편이 아니다. 밥을 준다니 고맙다.^^ 활동량은 엄청 늘었는데, 의도치 않게 열량을 지니치게 제한하고 있다.

스테이크를 시키고 샐러드와 맥주를 곁들였다. 맛보다는 여행 중 식단이 탄수화물 과다에 단백질과 채소는 결핍이라는 생각에 선택한 메뉴다. 트라파니에서는 트라파니 식 쿠스쿠스 couscous alla trapanese나 생선요리를 먹어야 한다지만 팔레르모에서 먹은 생선으로 충분하다 싶다. 내륙 출신 집안에서 길러진 입맛 탓인지 수산물 취향이 좀 보수적(?)이라 선뜻 낯선 해산물 음식을 주저하는 경향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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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을 받는 흑인 청년이 내 영어를 칭찬하며 한국에서 영어를 쓰느냐고 묻는다. 아니라 하니 그럼 공부를 한 거냐 묻는다. 내가 네게 영어 칭찬 받을 군번은 아니지 싶은데 젊은 청년의 스스럼 없는 모습이 좋다. 출신지를 물었더니, 나이지리아에서 왔단다. 호의를 표현하고 싶은데 나이지리아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한현민 밖에 없다. 한국에 나이지리아인 아빠를 둔 모델이 있는데 매우 인기가 있다고 했더니, 그가 한국 회사에서 일을 하느냐고 묻는다. 그렇다 하니, 이번에는 외국인이 한국에서 일자리 찾는 게 쉽냐고 묻는다. 말 잘 못 했다가는 한국에 일자리 찾으러 가겠다고 당장 짐을 쌀 것 같다. 아빠만 나이지리아 사람이지 한국에서 태어난 한국 사람이라고 했더니, 그러냐며 기세가 수그러든다.

음식이 나왔다. 하루살이가 계속 왔다 갔다 해서 귀찮긴 했어도 음식은 맛있게 먹었다. 잘 구운 고기는 아니었는데 원 재료가 좋은 것 같다. 그런데 계산서를 받아보니 액수가 예상 초과다. 술을 잘 안 마셔서 술 값을 잘 모르긴 하지만 맥주가 7.5유로나 되는 것이 이게 맞나 싶다. 계속 서빙을 해주던 나이지리아 청년을 불러 맥주 가격을 확인했다. 그냥 맞는지 확인 차 물은 것 뿐인데, 청년은 맞는다며 내가 정한 가격이 아니다, 아까 말했지만 나는 나이지리아 사람이고 주인이 아니다, 이 가격은 주인이 정한 것이지 내가 정한 것이 아니다 라며 나를 졸지에 자신을 자신을 의심하며 추궁하는 사람으로 만든다. 그 태도를 보니 단순 의문이 의심으로 바뀌어 메뉴판을 보자고 했다. 크기에 따라 3유로 차이가 있는데, 알아서 큰 것을 준 것이고, 가격은 맞았다. 알았으면 당연히 작은 것을 시켰다. 보통 음료를 많이 마시지 않아 오늘도 한참 남긴 참이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에게 옵션을 고지하지 않고 임의로 자신에게 유리한 쪽을 강요한 얄팍한 상술이 있었지만, 결국 메뉴판을 보지 않고 그냥 달라고 한 내 잘못이다. 그 청년은 슬쩍 바가지를 씌우려 했던 것을 내가 문제라도 삼을까 봐, 적반하장 격으로 죄 없이 의심을 당한 척, 억울한 척해서 상황을 모면하려 했던 것 같다. 이 상황이 씁쓸하다. 손님과 스몰토크도 나누려 하고 나름 충실하게 직업을 수행하려 애썼는데... 청년이 괘씸하기 보다 왠지 측은하다. 3유로에 내가 뭘 어쩔겠냐고... 왜 다짜고짜 그런 변명을 늘어놓아야 했을까? 천성이 좋지 않은 사람도 있지만, 주어진 상황에 맞춰지기도 한다. maybe he's just trying hard… 

거스름돈 2유로를 팁으로 되돌려 주니 청년의 표정이 밝아진다. 마음에 켕기는 짓 하지 말고, 핑계 대거나 변명하지 말고, 떳떳하고 당당하게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P.S. 시칠리아에서는 따로 팁을 주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coperto도 있고, servizio도 있고... 그들이 다 알아서 받아낸단다.^^ coperto는 일종의 자릿세. 테이블을 세팅해준 것에 대한 비용. 보통 빵이 놓여있으면 coperto를 받겠구나 생각하면 된단다. servizio는 그야말로 팁.





길었던 하루


숙소. 처음 방에 들어섰을 때는 어떤 것도 건드리고 싶지 않고 과연 이 침대에서 잠이 올까 싶더니, 시간이 지나며 익숙해지고 마음이 안정이 된다. 얼마나 빠른 속도로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고 살 방도를 찾는지 보면, 변화를 두려워하고 꺼릴 이유가 없다.

긴 하루였다. 이 섬에서 처음 다른 도시로 이동한 날. 생각으로는 고속버스를 타고 다른 도시로 이동하는 게 너무 큰일처럼 느껴졌었는데, 막상 오늘을 살고 나니 오늘의 하이라이트는 당연히 소금 박물관까지 걸어간 거다. 알레시오가 걸어왔다는 말을 듣고 대뜸 are you crazy? 라고 했었는데, 상황을 아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그렇게 말할 만했다. 언제나 느끼는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갈증을 이곳에서 해소해보려 했던 것 같은데, 그런 길인 줄 알고도 걷기로 했다면 미친 게 맞다.^^ 염전까지 안전하게 걷는 길이 생긴다면 얼마든지 다시 그 고생을 사서할 의향이 있지만, 그러지 않는 한 아무리 좋았어도 다시 그 길을 걷는 일은 없을 거다. 하지만 땡볕에 소금기 가득한 바닷바람 맞으며 웃다 쫄다 신나게 걸은 그 길은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이고, 벌써 그립고 또 앞으로도 영원이 그리울 순간이 될 것 같다.

무슨 일을 당하는 것 아냐 하며 긴장했던 순간이 몇 번 있었어도 아무일 없이 지나가면 금새 풍경에 신이 나서 아무 생각이 없었을 만큼 공포를 심각하게 느끼지는 않았다. 기운이 남았었다면 가면서 했던 후회를 다 잊고 걸어서 돌아오겠다는 객기를 부렸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알레시오의 말에 실린 뉘앙스를 명심하기로 했다.

이번 여행의 행운은 오늘 다 쓴 것으로 생각하고, 남은 여행 동안 남들 안 하는 짓은 아무리 하고 싶어도, 아무리 내눈에는 안전해 보여도 참는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