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레알레에서 본 conca d’oro 풍경. 황금 골짜기라는 뜻. 팔레르모가 자리잡은 분지를 일컫는 말]
터덜터덜 버스정류장으로 내려왔다. 하늘이 맑았으면 이 풍경이 감동적이었을까? 길 오른쪽으로 산으로 둘러싸인 너른 들판이 내려다 보이고, 시야에 다 담을 수 없을 만큼 넓은, 늘 그리워하는 하늘이 있는데, 아직도 grumpy mode인지 다 그냥 그렇다. 정류장 이름은 fontana del drago. 용의 분수라는 뜻인데 분수가 있었으리라 추정되는 자리만 있다. 용님께서는 이 너른 하늘 위 어딘가로 승천하셨나? 길가 벼랑 끝으로 가서 팔을 퍼덕거리면 왠지 나도 날아오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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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정류장 주변 좁은 인도에는 이미 사람들로 빽빽하다. 성당 다녀가는 사람들일 테고 그러면 그곳이 버스 정류장이 맞겠지 싶지만, 길 건너 버스정류장으로 보이는 시설물이 있어 확인하는 게 낫지 싶다.
옆에 있던 중년 아저씨에게 이탈리아어로 물었다. 그랬더니 영어하냐고 되묻는다. 미안하다고, 관광객 대부분이 이탈리아 사람인 것 같아 이탈리아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실례했다고 했다. 그랬더니 유럽 국가들의 휴가철은 대부분 끝났는데 이탈리아 휴가철은 아직 끝나지 않아서 이탈리아 관광객들이 많다고 한다. 어디에서 왔냐고 물었더니, 프랑스란다. 실례를 한 터라 뭔가 우호적 액션을 해야 할 것 같아 파리에 가봤다고 말해줬다. 그랬더니 친구가 파리 출신이라며 젊은 청년을 소개해 준다. 중년 아저씨는 영어를 하긴 했지만 영어가 편한 사람은 아니었다. 스페인어를 잘했는데 할머니가 스페인 사람이었단다. 청년은 영어를 잘 했다. 파리에서 인상 깊었던 것에 대해 말하니, 자신은 아시아 국가에 가본 적이 없다며 미안하단다. 미안할 일은 아니지. 시간 많은데 뭐 했다.
버스가 올 시간을 한참 넘겼는데 올 생각이 없다. 이것들이 진짜... 속이 부글부글. 6시 차 탄다 생각하고 회랑까지도 보고 왔어도 될 뻔했다. 버스가 언제 올지 모르니 자리를 뜰 수도 없어 프랑스 커플과 계속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여기는 몇 시에 왔냐고, 시간이 너무 부족하지 않았냐고 물었다. 청년이 자기는 부족하지 않았단다. 두세 시간이면 충분이 볼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지역local의 역사와 문화를 잘 모르는 내게는 넉넉한 시간이 아니었다고 하니, 이구동성으로 local이 아니란다. 신약과 구약의 이야기고 일반적인 유럽의 역사라고... 내가 유럽사람으로 보여? 그게 나한테는 local이야 라고 말하니, 둘 다 잠시 멈칫... 그리고 웃으며, 네게는 local이 맞지 한다. 자신들의 역사를 세계의 역사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의 새삼스러운 확인...
시칠리아 여행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중년의 남자는 이번이 네 번째 시칠리아 여행이란다. 볼 것도 많고 아름답고 물가가 싸서 좋단다. 이번에는 청년에게 보여주고 싶어 같이 왔다고 한다. 무심코 무슨 관계냐고 물었다, 관계를 묻는 질문이 얼마나 민감한 질문일 수 있는지 꿈에도 모른 채... 여행을 시켜주는 사이라고 하니 대화의 맥락상 묻게 된 것이지, 그들 관계가 궁금하고 그랬던 것은 아니다. 부자 관계니 라고 물으려다 너무 닮은 구석이 없어 무슨 관계냐 물었지만, 여전히 ‘부자’ 사이라는 답을 기대했다. 순간 중년 남자는 어딘가로 사라졌고, 젊은 남자가 partner라고 대답한다. 바로 말도 알아들었고 뜻도 알아들었다. 그런데 입을 막지 못하고 뭐라고??? 라고 다시 물었다. partner 라고 다시 대답하는 청년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가 있다.
묘한 웃음이 얼굴에 돈다. 너희 다른 곳에 산다고 했잖아??? 라는 말이 튀어 나올 뻔했다. 중년의 남자는 툴루즈에 산다고 했었다. 당황했다. 엄청 당황했다. 하지만 쿨한 척 uh, ok 하고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청년도 내 당황을 파고들지는 않았지만, 자율신경이 조절하는 내 눈 크기의 변화를 다 봤을 것이다. 버스는 계속 오지 않았고, 한동안 계속 태연한 척하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야 했다. 혼자 하는 여행이 프랑스 청년에게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지 이것저것 계속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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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가 왔다. 사람이 너무 많아 대형을 유지하며 대화를 계속할 상황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청년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아까 그 묘한 웃음을 짓는다. 당황함을 숨기려 어쩔 줄 모르는 내 속이 보이나 싶다. 부자 관계냐고 묻지 않은 것만도 천만다행이다 싶다. 그렇게 물었다면 내 입을 쫑쫑 꿰매고 싶었을 것 같다. 이제야 처음에 중년 남자가 친구라고 했었던 게 생각난다. 으악...
나는 왜 당황했을까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게이 커플이 내게 당황스러운 존재는 아니다. 주변에서 몇 번 보기도 했고, 가깝게 지내던 사람 중에 동성애자임을 뜬금없이 고백해왔던 사람이 몇 명 있었던 터라 나름 익숙하다. 그러다 청년이 여자였어도 마찬가지였겠다 하는 생각이 들며, 당황의 이유의 정체를 알겠다. 나이 차였다. 부자라는 대답을 예상할 만큼 나이차이가 많았다.
바르셀로나에서 게이들이 모인다는 광장의 풍경. 늙수그레한 남자가 소년의 티를 벗지 못한 남자아이를 끼고 있었다. 앙코르와트 풍경 속에는 어리디 어린 동양 여자를 끼고 다니는 늙은 서양 남자들이 있었다. 내게 그들 관계의 매개는 딱 두 가지뿐으로 보였다. 충격이었고 상처였다. 순간 그 때의 감정이 떠올랐었던 것 같다.
프랑스 청년은 소년의 티를 벗은 지는 한참 된 학생이었고, 정직할 필요가 없음에도 정직했다. 그런데 왜 나는 그 관계가 그의 치부라 여기며, 만천하에 치부를 공개당한 사람을 바라보는 애처로운 심정이 되어 당황한 걸까? 그의 dignity를 훼손하는 색안경이다. 함부로 판단하지 말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