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는 남쪽 바다와 북쪽 바다; 아래는 비 내리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거리corso vittorio emanuele. 가운데 건물은 Palazzo Senatorio]
트라파니Trapani는 시칠리아 서북쪽 끝에 있는 항구 도시이고 트라파니 지방Provincia di Trapani의 수도이다. 이탈리아 요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소금 때문에 트라파니라는 이름을 알게 되지 않을까 싶다. 내가 그랬다.^^ 트라파니 산 소금은 높은 품질로 명성이 높다. 또한 이곳은 시칠리아 대표 음식 트라파니 식 쿠스쿠스couscous alla trapanese의 고향이기도 하다.
[에리체: 비너스 성]
[세제스타 그리스 신전과 극장]
염전이 보고 싶어 트라파니를 일정에 넣고 보니, 트라파니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여행자들에게 교통의 요지였다. 만화영화 천공의 성 라퓨타에 영감을 주었다는 에리체에 가려면 어쩔 수 없이 들러야 하는 곳이고, 그리스 신전이 온전히 남아있는 세제스타segesta를 다녀오기에도 팔레르모보다 이곳이 낫다. 해변을 즐기는 서양 여행자들도 교통편 때문에 트라파니에 오는 것 같다. 산 비토 로 카포와 카스텔라마레 델 골포 등 팔레르모 서쪽 끝에 있는 해안 도시로 가기도 좋고, 에가디 제도와 판텔레리아 섬 등을 방문하려면 트라파니 항구에서 배를 타야 한다.
[트라파니 항구]
[트라파니 염전.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라고...]
[트라파니 식 쿠스쿠스]
시칠리아 고대 역사 속에 두 세력이 등장한다. 그리스와 페니키아. 그리스는 섬 동남쪽 시라쿠자가 근거지였고 페니키아는 트라파니 인근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트라파니라는 이름도 낫을 뜻하는 페니키아 시절의 이름 drepanon에서 왔다고 한다. 그 시절 트라파니는 페니키아와의 무역 중심지였고, 엘리미족(고대 시칠리아 3대 원주민부족 중 하나)의 주요도시 에리체를 위한 항구였단다. 그런데 페니키아와 관련된 역사는 카더라 통신처럼 아무런 흔적이 없다. 고대 그리스의 흔적이 넘쳐나는 것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다. 도시를 감싸는 북아프리카의 느낌이 있다는데, 북아프리카를 안 가봐서 그런지, 내가 이곳에서 느낀 아랍의 느낌은 트라파니 식 쿠스쿠스가 전부라고나 할까... ^^
시칠리아를 지배한 첫 스페인 세력은 아라곤 왕국. 아라곤 왕국의 페드로 3세가 첫 발을 내딛은 시칠리아 땅이 트라파니 항구라고 한다. 중세시대에 이곳은 주요 세력의 근거지였던 튀니지, 나폴리, 스페인의 아라곤을 잇는 해상 경로의 중심이어서 많은 왕이 거쳐가는 곳이었다고...
[산호 작품들: 산호 구슬로 수놓은 제의; 산호로 장식된 성작; 산호로 예수의 탄생을 표현한 장식품; 산호 구슬로 수놓은 altarpiece]
[트라파니 가는 길: 올리브 밭, 포도밭이 보인다.]
소금 말고도 참치 잡이와 산호 채취와 가공이 옛날부터 유명했단다. DOP 레이블이 있는 올리브 오일도 있고, 또 유럽에서 프랑스 보르도 다음으로 넓은 와인 산지란다. 시칠리아 포도밭의 절반 이상이 트라파니 지방에 있단다. [DOP는 Denominazione di Origine Protetta의 약자로, 직역하면 '보호된 원산지 명칭'이란 뜻. 특정 지역에서 엄격한 생산관리 시스템을 거쳐 생산된 특산품이라고 보면 된다.]
시칠리아가 제 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의 폭격으로 쑥대밭이 되었었다고 하던데, 이곳도 예외는 아닌지, 폭격 이후 지어진 무취한 건물들이 도시 경관을 많이 망가뜨렸다고 한다. 역사에 비해 남아 있는 유적이 별로 없는 곳이라고 하는데, 2차대전 중 폭격이 한몫한 듯하다.
P.S.
처음에는 에리체에서 하루 자고 트라파니에서 2박을 하려 했으나, 에리체에 들어갈 때 나올 때 모두 트라파니를 거쳐야 해서, 트라파니에 머물며 당일치기로 에리체에 다녀오는 것으로 계획을 바꿔 3일을 머물렀다. 나머지 이틀도 하루는 세제스타를 다녀오고 하루는 염전에 다녀올 생각이었고, 트라파니 자체에 대해서는 별 기대가 없었다. 숙소도 전 일정 중에 유일하게 엉망이었고 감동스러운 유적도 딱히 없었는데, 이상하게 정이 들었다.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5분만 걸으면 만날 수 있는 바다와 하늘이 아니었을까... 바다와 그 위로 떨어지는 노을... 트라파니 역사 지구historic center는 바다로 가늘고 길게 손가락처럼 뻗어 나온 곶에 있다. 남쪽 해변에서 북쪽 해변까지 아마도 걸어서 10분이면 갈 거다.
시칠리아 한 달 살기를 한다면 어디가 좋을까 생각할 때, 가본 곳 중에 거기는 안 돼 하는 곳은 딱히 없어도 방문했던 모든 곳이 떠오르지는 않는다. 그런데 트라파니는 생각난다. 시칠리아를 탐구할 생각이면 잘 모르겠지만 휴식이 필요할 때 너무 심심하지도 않으며 유유자적 머물기에 좋은 곳 같다. 주변에 다녀올 곳도 많고, 체팔루, 시라쿠자, 타오르미나처럼 관광객이 너무 많지도 않고... 구 시가지에서라면 도시에서 생활하며 아침에 수영장 들렀다 출근하듯 바다에서 수영하고 출근하는 꿈같은 삶이 가능할 것 같다.
[트라파니 풍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