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6/2020

시칠리아 여행: 05: 팔레르모: 잠시 안녕, 팔레르모!



새벽


짐 싸느라 자정을 훨씬 넘겨 잠자리에 들었는데 자다 깨다를 반복하고 있다. 거의 1시간 간격으로 깨고 있나 보다. 긴장한 탓이겠지만 한편 몸이 기절할 만큼 힘든 상태는 아니라는 증거다. 나쁘지 않다. 거울 속 안색에는 이 심란함이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다. 심지어 콧등 주름까지 옅어 보인다. 엄청 행복하다는 얼굴... 누구냐, 넌? ^^ 첫 이동을 앞두고 긴장했다기 보다 긴장한 척 엄살을 떨고 있는 건가?

버스 정류장, 매표소 다 확인해놨다. 그리고 종점에서 내리면 되니 내릴 걱정도 없다. 폴리테아마 극장 근처(Via Filippo Turati, 5)에 Segesta 버스 회사 사무실이 있다. 그곳에서 표를 사고, 그 앞에서 버스를 타고 종점 porto di trapani에서 내리면 된다. 이렇게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데도 걱정이다. 이런 나... 낯설다.

어제 출출하면 먹으려 샀던 초콜릿 케이크도 신경이 쓰이고 마음에 안 든다. 저녁에 생각 없으면 아침에 먹지 했는데, 바싹 마른 입에 꼭두새벽부터 케이크가 당길 리가 없다. 아란치나나 빠니니를 살 걸... 그랬다면 싸가지고 가서 버스 안에서라도 먹을 텐데, 저것은 코코아 파우더에 크림에… 가루 날리고 크림 여기저기 묻고... 접시에 올려 포크를 사용하지 않는 방식으로 먹는 것은 생각만 해도 심란하다. 배낭에 넣었다가는 곤죽이 될 테고, 버릴 수는 없고… 일년에 몇 번 먹을 수 없는 저 귀한 것이 이런 푸대접을 받다니...

휴대폰에 글을 쓰다 보니 제대로 된 키보드에 넉넉한 화면이 너무 그립다. 이를 극복하려는 휴대폰 자판 위 추천 기능은 이게 최선일까? 우리말과 글을 제대로 이해하는 지능을 심기는 한 걸까? 우리말을 제대로 하는 사람의 조언은 구했을까? 다양한 조사가 명사 뒤에 붙을 수 있는 건 맞지만, 그래도 기본 ‘은는이가’나 ‘을를에게’가 붙은 건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무식하고 용감하면 죄라고 했는데, 이 기능은 무식하고 용감하다. 번번이 내 의도를 멋대로 짐작하고 필요 없는 것‘만’ 보여준다. 기본이라도 하라고!!! 어쩌다 한 번 유용했던 기억 때문에 혹시나 하며 제시된 것을 확인하느라 오히려 시선이 분산되고 집중력이 떨어진다. 일부러 넣은 스페이스는 제가 뭘 안다고 번번이 없앨까... 그래서 어쩌다 맞아서 입력하니 이어진 문구를 제멋대로 기계적으로 대체해 날려 버린다. 이런 빌어먹을, 그게 얼마나 힘들게 한땀한땀 넣어놓은 글자들인데... 성질 버럭~~^^

귀찮아서 원래 쓰려던 말 대신 추천된 것을 쓰고 그것에 맞춰 뒷말을 바꿔볼까 하는 유혹이 있다. 하지만 '이런 멍청한 기계 따위에 좌지우지당하고 싶지는 않아' 하며 꿋꿋이 느린 손가락을 놀린다. 이런 어설픈 기능이 글쓰기를 이런 도구로 시작하는 세대의 언어 습관을 좌지우지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그야말로 엄습하며, 기계들의 지능에 대한 거부감이 확 일어난다. 하려면 잘 하든가... 영어로 쓸 때는 정말 내 의도를 읽는 듯 쓰고 싶었던 단어를 잘도 제시하던데, 우리말로는 단어는커녕 조사도 딱딱 못 맞춘다. 조사도 많고 어미변화도 심하고 데이터도 많지 않아 어렵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제대로 연구해서 잘 하라고!!! 괜히 엉뚱한 데 짜증을 내고 있다.





잠시 안녕, 팔레르모


[팔레르모: 바늘 끝만큼 보이는 해님. 사진을 보니 이 순간 성 이냐시오 교회 돔 바로 위로 날던 갈매기가 찍혔다. 안녕, 잘있어~]

[마시모 극장]


한 달 후 다시 돌아와서 집에 가기 전에 며칠 더 있을 거지만 그래도 일출을 보며 안녕을 고하고 싶어 창을 열었는데 오늘은 구름이 너무 짙다. 보일까 싶었던 해님이 바늘 구멍만한 틈으로 존재를 알린다. 팔레르모 하늘에 인사한다. 잠시 안녕, 그 동안 잘 있어~~

케이크... 아무리 생각해도 저 귀한 걸 그냥 버릴 수는 없다. 먹어 버리려 한 입 먹으니, 왠걸... 맛있다. 다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뭐든 처음 한 발짝이 어렵다는 메시지 같다, 오늘 딱 필요한... 아메리카노 한 잔이 있다면 얼마나 감사했을까... 아무튼 트라파니까지 가기에는 충분한 설탕과 카페인 섭취. 칫솔 챙기기를 마지막으로 그야말로 all set, ready to go!!!

다비드가 출근하기 전이라 열쇠를 테이블 위에 두고 방을 나선다. 그렇게 하기로 다비드와 이야기를 해뒀다. 

작별 인사를 나눌 사람이 없는 게 조금 서운하다. 숙소가 너무 조용하다. 누구도 깨우지 않겠다는 의지로 살금살금 걸어 최대한 소리 나지 않도록 조심스레 문을 여닫고 나왔다. 뭘 그렇게까지 조심해? 너 지금 야반도주하는 거야? 하는 마음의 소리가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