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토라나 내부. 이런 스타일의 기둥을 fatimid 스타일이라고...]
산 카탈도와 나란히 있는 해군제독의 산타 마리아 교회chiesa di santa maria dell'ammiraglio는 1143년 안티오카의 죠르지오giorgio d'ㅁntiochia라는 사람이 세웠다. 1143년은 노르만 왕조 1대 왕 루제로 2세의 통치시기였는데 중세 시칠리아의 황금기였단다. 개방적이었고 서로 다른 문화가 다투지 않고 조화롭게 섞여 있던 어쩌면 기적 같은 시기였다고...
이 교회의 건축주 죠르지오는 이름이 말해주듯 시리아 안티오카antiochia에서 태어나, 튀니지를 거쳐 시칠리아로 오게 됐단다. 당시 해군제독은 왕국의 2인자라고 할 만큼 군사, 외교, 국정의 총책임자의 지위였는데, 외국 출신인 그가 요직 중의 요직에 올랐던 거다. 노르만 왕조의 개방적 분위기를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아무튼 이름의 해군 제독ammiraglio이라는 말은 그렇게 유래했다.
이 교회는 마르토라나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교회 설립 후에 얼마 지나지 않아 귀족 여성eloisa martorana이 교회 바로 옆에 베네딕트 수녀원을 설립했고, 설립자의 이름을 따라 마르토라나 수녀원이라 했단다. 그런데 죠르지오 가문의 후사가 없어 왕실 소유가 되었던 이 교회를 15세기 당시 시칠리아를 지배하던 아라곤 왕이 수녀원에 영구기증한 것이다. 그때부터 이 교회가 수녀원 설립자의 이름으로 불렸단다.
천년의 세월을 지나온 만큼 천년의 역사가 교회에 담겨있다. 처음엔 죠르지오의 가문의 교파를 따라 그리스 정교회 교회였다가 로마 가톨릭 교회였다가 다시 그리스 정교회 교회로 정체성의 변화도 있었고, 13세기 시칠리아 만종 사건 때 프랑스 앙주 가문을 몰아내고 스페인의 아라곤 왕을 왕으로 추대하는 역사적 결정을 이곳에서 내리기도 했단다.
[frutta di martorana]
시칠리아 제과점에 가면 예외 없이 울긋불긋한 과일모양의 단 것을 판다. 아몬드가루를 달게 반죽한 마지판이라는 것으로 과일 모양을 낸 것인데, 마르토라나의 과일frutta di martorana이라고 불린다. 언젠가 한번 먹어보고 감당할 수 없는 저세상 단맛임을 깨닫고 아무리 예뻐도 아예 시도도 하지 않는 그것... 그 마르토라나의 과일의 탄생지가 이 교회이기도 하단다. 나무에 과일이 없는 계절에 왕이 수녀원을 방문한다는 소식에 수녀들이 마지판으로 과일 모양을 만들어 나무에 매달아 두었고 이 일을 계기로 마르토라나의 과일이 탄생했단다. 당시 마지판은 수녀원에서 봉쇄된 생활을 하는 수녀들의 중요한 생계 수단이자 외부와 소통하는 유일한 창구였다고 한다.
[마르토라나 북쪽면과 종탑. 바로크 스타일 정면 왼쪽으로 붉은 돔이 있는 오리지널 아랍-노르만 스타일이 보인다. 오른쪽 사진의 종탑은 돔만 지진으로 사라졌고 원래 모습이란다]
벨리니 광장에서 보이는 모습은 교회의 북쪽 면인데, 16세기에 원래 있던 나르텍스와 아트리움을 없애고 바로크 양식으로 개조했단다. 바로크 양식으로 개조한 부분은 왼쪽 아랍-노르만 양식을 유지하고 있는 부분과 다른 건물인가 싶을 정도로 이질적이며 부조화스럽다. 내부를 보고 나면 저 바로크식 facade가 이 건물의 가치를 얼마나 훼손하고 있는지 더욱 느껴진다. [아트리움(Atrium)은 성당 서쪽 입구에 설치하는 회랑 같은 구조물로 회랑처럼 중정이 있다. 나르텍스(Narthex)는 아트리움과 본당 사이에 있는 구조물로 성당의 현관이나 전실의 역할을 한다.]
오른쪽 뒤에 있는 종탑은 꼭대기에 있던 붉은 돔만 지진으로 파손되어 철거됐고 나머지는 12세기 모습 그대로란다. 내부는 동쪽 제단과 서쪽 입구 부분이 바로크 양식으로 개조되었다. 중간 붉은 돔 아래 부분에만 모자이크가 보존돼 있다. 남아있는 모자이크를 보면 당시 아무리 바로크가 유행이었다지만 모자이크를 없애고 바로크 스타일로 인테리어를 한 생각을 이해할 수 없다. 미적으로나 문화적 가치로나 만행에 가까운 결정인 것 같은데 반종교개혁에 동참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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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레알레와 비교할 수 없이 작은 규모이지만, 환하고 천정이 낮아 모자이크가 선명히 잘 보이고 몬레알레에서 미처 느끼지 못한 감동이 있다. 보석 같은 공간이다.
[예수와 네 대천사들. 이곳에는 다른 아랍-노르만 교회 제단에 있는 그리스도 판토크레이터가 없다. 제단을 바로크 스타일로 개조할 때 없앤 건지 원래부터 없었는지 알 수 없다. 대신 돔 천정에 전신 판토크레이터가 있다. 그런데 손이 반대다. 보통 오른 손을 들어 축복을 기원하고, 왼손에 구약성서가 있는데 이곳은 반대다. 이유가 있는 걸까?]
[왼쪽: 그리스도에게 왕관을 받는 루제로 2세. 드물게 남아있는 루제로 2세의 모습이란다; 오른쪽: 성모마리아와 죠르지오. 성모마리아 발치에 거북이 모양으로 엎드려 있는 사람이 죠르지오라고... 그가 해군제독에 오른 것이 노르만 왕조의 개방성을 보여주는 일화라지만, 자신이 세운 교회를 장식한 모자이크 속에서 부복한 한 모습을 보니 생각이 달라진다. 예수 앞에 서서 왕관을 받는 루제로 2세에 비하면, 그는 땅을 기는 벌레다. 자신의 교회에도 자신을 저렇게 우스꽝스럽게 표현되게 할 만큼 낮추고 참고 견디며 살았다면 어떤 폐쇄적인 사회에서도 성공이라는 것을 하지 않았을까? P.S. 거북이처럼 표현된 모습은 비잔틴 특유의 엎드려 절하기 자세라고 한다.]
[오른쪽은 윗부분은 예수의 탄생, 아래쪽은 성모 안식. 성모 안식은 동방 정교회의 교리로 가톨릭의 성모 승천과 차이가 있단다.]
[맨 위는 수태고지]
[성모 마리아의 엄마 성녀 안나와 아빠 성 요아킴]
[위: 바로크 스타일로 개조한 제단과 입구 부분; 아래: 입구 위에 보이는 철망은 수녀원에 기증된 후 설치된 장치란다. 수녀들은 입구 위 이층 철망 뒤에 숨어 미사를 봤다고... 당시 귀족들이 딸을 결혼 전에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수도원에 맡기기도 했단다. 수도원에서 살다 수도원 교회에서 결혼하고 신랑의 집으로 가는 일도 있었다고... 할 말이 너무 많아지지만, 입을 다물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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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결혼식이 있어 서둘러 교회를 나와야 했다. 조금 더 늦었으면 아예 못 볼 뻔 했다. 팔레르모 사람들이 선호하는 결혼식 장소란다. 내 취향도 몬레알레 보다는 이곳이다. 결코 몬레알레 결혼식에 대한 뒤끝은 아니다.^^ 입구에 새하얀 비둘기가 있더니, 광장에서 교회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비둘기 열두 마리를 날려보내는 게 이곳 결혼식의 하이라이트란다. 첫날 벨리니 광장에서 봤던 신랑신부도 이곳에서 결혼식을 한 것이었나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