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3/2008

산티아고 가는 길: 18: Atapuerca까지



record day... 5시 반 출발, 11시 반 목적지 도착. 12시 반 알베르게 들어감. 날씨는 비, 비, 비. 유럽 최고 고인류 화석이 발견된 곳이라는데, 유적 발굴된 곳에 가보고 싶었으나 비도 오고... 포기.




사람들이 헤드랜턴이 필요하다고 해서 장만은 했지만, 정말 필요한 상황이 있을 줄이야...

어제 마을에서 나가는 길을 봐두길 잘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매우 당황했었을 듯.

일단 길에 들어서니 별 어려움은 없다. 산길이라 조금 걱정스러웠지만 길은 순하다. 달이 사라지고 동이 트는 것도 보고, 뭐든 따라 해보길 좋아해서 일찍 출발해보자 했는데 좋다. 비가 옴에도 불구하고...

스위스 사람인데, 41세때부터 이탈리아에서 살아서 이탈리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 할머니. 잔뜩 구부렸고, 자세가 불안해 보인다. 괜찮느냐 물으니,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란다. 네, 하지 않을게요. 걱정 말라 해도 걱정을 주장하고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 말라면 하지 않는 게 배려.

재킷 모자 위해 우비 모자를 덧썼으니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목적지가 같길래 목적지에서 만나자 하고 먼저 왔다. 바에 들렀다 알베르게에 오니, 할머니가 먼저 왔다. 어디 있었느냐고 묻는다. 귀여운 할머니. 벨기에 안트베르펜 출신 얀 할아버지도 보고. 벨기에에 살던 우리 조카 친구와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왠지 잘해주고 싶은 할아버지... ^^ 대뜸 이메일 주소를 주며 나중에 이메일 보내라신다. ^^ 그러겠습니다 했지만 과연 보내게 될까?

영국인 제인과 브라이언 부부와 같은 방을 쓰게 됐다. 맨체스터 출신이란다. 박지성을 아느냐고 물어온다. 물론, 알지요... 했더니 챔피언스 리그에서 맨유가 이겼단다. 그 기쁨을 나누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I’m happy for him(박지성)이라고, 그가 good player란다. 당연하지... 그렇지 않으면 너희 훌리건이 가만히 있겠니... 그는 돈 있다고 구할 수 있는 선수는 아니야, 그런 선수를 만난 행운에 감사해야 할걸... 이라는 말이 떠올랐지만, shut up...

zubiri 알베르게가 최악이었지 싶다. 알베르게가 다 그렇게 좋은 환경은 아니라도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알베르게에서 지내는 것이 나쁘지 않다. 불필요하게 훌러덩훌러덩 벗는 인간들이 거슬리지만 안 보면 된다.

독일인이 워낙 많아 독일인들과 이야기를 많이 하다 보니 지각 있는 독일인들이 독일인들을 부끄러워한다. 그들의 무례가 내게 미안했던 걸까... 소냐도 크리스티나도 내게 사과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다수라 패거리 문화가 형성돼서 그런 것 같다 싶은데, 어제 크리스티나는 교육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유럽의 중국이 독일이라고도 했고, 구한이 있어 독일인들이 아무리 많은 돈을 쓰고 가도 별로 환영 받지 못한다는 말도 들어봤다. 우리가 근면 성실하고 강인하다는 이미지를 갖고 있는 독일인에 대해 유럽 사람들은 매우 다른 이미지를 갖고 있나 보다. 그런데 그런 말의 사례를 보여주는 것 같은 독일인들이 진짜 많다. 나도 여러 번 그들의 무례함에 마음이 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좋은 사람도 많다. 여자친구 때문에 할 수 없이 따라와서 벤츠나 BMW 같은 좋은 차가 얼마나 많은데 왜 걸어 다니느냐던 독일 아저씨, 심심한지 나를 앉혀놓고 온갖 유럽의 역사 이야기를 해주었고, 소냐도, Ursula도, 크리스티나도, 이름은 모르지만 명랑 쾌활한 roadrunner도 다 독일인이다. 좋지 않은 경험에 독일인이라는 카테고리를 만들고 싶지 않다.

오늘 저녁 먹었던 레스토랑은 미셰린 별까지는 아니라도 스티커가 붙어 있었는데, 최고의 menu del día였다. 흰 아스파라거스에 발사믹 식초와 올리브유를 뿌린 것. 빵으로 접시를 싹싹 닦았다. 광어로 보이는 생선튀김도 깨끗하게 먹었다. 서빙하는 아가씨가 명랑하고 센스가 있어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기도 했다. 사람이 아름다운 게 무엇보다 아름답다 싶다.

매일 인사를 해도 자기가 무슨 어른으로 마땅히 받아야 인사를 받는 듯, 고개만 까딱하며 점잖을 떠는 (상대적으로) 젊은 녀석이 있었다. 오늘 바에서 또 얼굴을 부딪혔는데 빤히 봐주기만 했다. 널 이제는 이렇게 다뤄주겠어 라는 메시지를 담아... ^^

문이 열려야 바에서 나갈 수 있는데 문이 열리지 않는다. 누가 왼쪽으로 돌리라며 참견을 하는데 돌아보니 그 녀석인데, 인사를 안 해줘서 그런가 거만함을 좀 덜었다 싶었고, 너는 이렇게 다뤄줘야 하는 사람이구나... 했는데, 다른 사람과 착각하는 건가 싶다. 너무 많은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사람은 얼굴로 많은 말을 한다. 팜플로나 출신 청년... 볼수록 마음에 든다. 그 세대 특유의 배타적인 느낌이 없다. 대가족 속에서 잘 자란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런 느낌이 얼굴에 담겨있다. 눈과 표정과 미소 속에... 노인들을 예의 바르게 대하고 먼저 다가가 친근하게 말도 붙이고 친구가 된다. 다른 외국인 순례자들을 대할 때도 도움이 되려하고 자기 손님인 듯 대접하려는 태도가 보인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청년이 어떻게 저렇게 속이 깊고 sweet할까... 내일은 이름을 물어보리라...

내 얼굴엔 어떤 사람이 있을까... 뭘, 더도 덜도 아닌 내가 있겠지...

인터넷 하러 갔다가 어떤 아주머니 이메일 보내는 것을 도와줬더니, 그 아주머니가 동네방네 내 이야기를 하고 다니신다. 감동하신 것? 그리고 그게 그렇게 인상적일 일? 왜 이러셩~~ 나 IT강국에서 IT회사 다녔던 여자야... ^^ 그 아주머니는 친구와 같이 왔는데, 그 친구는 차로 따라다닌다. 그러니까 한 친구는 걷고, 한 친구는 차를 타고 속도를 맞춰 같이 다니는 것이다. 그러니 친구는 부츠에 스웨이드 코트에... ^^ 그 친구가 수다 친구가 필요한지 내게 온갖 이야기를 해준다. 차로 따라다니면서 친구 힘들면 조금씩 태워주곤 하는데, 힘겨워 보이는 한국 사람 둘을 태워주겠다고 했더니 한사코 거절하더란다. 나보고는 저녁을 같이 먹으러 가잔다. 하하.. 아주머니... 저도 마음만 받을게요... 그깟 컴퓨터 사용법 조금 알려줬다고 마음을 활짝 열었다. 보기에는 너무 단단한 것 같은 사람 사이 장벽이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 건지 보여주는 것 같다.

2주를 넘어서니 이제 알베르게에서 지내는 것에 나름의 방식이 생긴다. 물건들을 배낭에서 차지하는 공간에 따라 용도에 따라 주머니 몇 개에 나누어 담고, 그대로 배낭에 넣는다. 우비, 배낭커버, 신발주머니 등 물기가 있는 것은 통풍이 잘 되도록 망사 주머니에 몰아 넣는다. 약, 손톱 깎기, 칼, 세면도구 등 급히 꺼낼 일이 있는, 배낭 윗주머니에 넣는 것들도 한데 모은다. 옷들도 한 주머니로 모으고, 샤워도구는 물이 새지 않는 플라스틱 통에 모아 넣는다. 잘 때 필요한 귀마개, 마스크, 베게는 침낭에 작은 주머니를 매달아 보관한다. 모두 정해진 자리가 있다.

알베르게에 도착하면 짐부터 푼다. 쓰기 편하도록 주머니들을 꺼내 침대 기둥에든 배낭에든 매달아둔다. 되도록 잘 보이는 곳에, 챙길 때 빠뜨리는 일 없도록... 그리고 신발 벗고, 슬리퍼로 갈아 신는다. 그리고 침대 위에 침낭을 펴고, 베게 불어놓고, 샤워하고 빨래하고... 그럼 이제 먹고 이만 닦으면 된다.

어제 새로 배운 것이 있다. 자기 전에 짐을 최대한 챙겨놓는 것. 아침에 일찍 출발할 생각으로 저녁 먹고 이 닦고 모든 짐을 챙겼다. 옷은 미리 입고 자고, 양말은 신을 것 한 켤레 꺼내두고... 그랬더니 아침에 침구과 슬리퍼만 챙기면 됐고, 꺼내기 쉬운 곳에 넣어둔 세면도구 꺼내서 세수만 하고 출발하니, 눈 뜬지 30분만에 출발이 가능했다.

매일 다 풀었다 다 싸야 한다. 안 풀어도 되는 짐이 하나도 없다. 도대체 뭘 한다고 매일 짐 싸는데 이렇게 걸리나 했는데, 공간만 빼고 필요한 것을 다 풀었다 쌌다 하니 무리는 아니다 싶다. 그런데 얼마나 적은 양이 필요한지 놀랍기도 하다. 아쉬운 것은 책 몇 권과 컴퓨터 밖에 없을 정도로 있을 것 다 있는데, 40리터 배당을 반도 못 채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