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4/2008

산티아고 가는 길: 09: Lorca까지



언니들과 헤어졌다. 무릎이 아파서 더 이상 같이 갈 수가 없었다는 것이 일부러 꾸며낸 핑계는 아니었다. 이번에는 작은언니가 그 말 뒤에 숨은 혼자 걷고 싶어하는 마음을 읽었는지, 선선히 먼저 가겠다고 한다. 이메일, 전화번호 교환하고, 알베르게 방명록에 소식 남겨두기로... 그리고 혹시 또 못 만나면 한국에서 만나자고, 만나면 맛있는 것 사준다며...

비가 내리고 맥주 한 잔 앞에 놓고 저녁을 기다린다.
날씨는 어찌나 변덕이 심한지...

해가 잠깐 나길래 어떻게 공짜로 말려볼까 하며 널어 놓은 빨래를 걷으러 헐레벌떡 뛰어가니 누군가가 이미 걷어 안에 널어 주었다. 얼마나 고마운지...
하지만 내일 아침까지 말린다는 것은 불가능. 그냥 건조기에 넣었다. 언니들 따라 다른 순례자들과 함께 말린 적이 있는데, 그때 냄새 나는 빨래와 섞인 건지, 셔츠에서 냄새가 나려 하는 것 같다.

알베르게. 쾌적해 보였는데 2/3가 아저씨로 차고, 위, 아래, 옆. 모두 아저씨들에게 포위당하다 보니 잘 때 말고는 들어가고 싶지 않다. 알베르게에서 언니들의 존재가 의지가 됐었는데, 언니들이 없으니 더욱 그런 것 같다.

뜨끈한 곳에 편안히 누워 TV를 보거나 자는 것이 휴식 같지만, 이곳은 그런 것이 허락되는 곳이 아니다. 걷지 않는 것을 휴식이라 생각하기로 한다.

무릎이 아프다. 얼마나 심각한 건지, 어떻게 하면 나을지 아무 생각이 없다. 한번도 이렇게 아프도록 걸어본 적이 없어서...

무겁다고 두꺼운 옷을 집으로 보내고 나니, 날이 점점 추워진다. 양말을 신고 자야 하는지...

알베르게만 아니라면, 이 길은 순례가 아니라 유람일 것이란 생각이 든다. 일정에 쫓기지 않아도 돼서, 또 계절이 좋아서 그런 생각이 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걷는 고통을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는다.

물집 아래 물집... 층층이 잡힌 물집과 씨름하는 걸 본 육 척 장신의 아가씨가 약품을 이것저것 챙겨준다. 없는 와중에, 힘겹게 지고 다니는 귀한 것을 선뜻 남에게 나눠주는 일...다른 사람들의 순례기에서 그러더라는 이야기는 여러 번 읽었는데, 진짜 일어나는 일이었다. [소냐였다. 나중에 친해져서 잘 지냈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