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9/2008
산티아고 가는 길: 35: Ruitelán까지
파라도르에서의 아침 식사. 어떤 음식이 기다리고 있을지 잔뜩 기대하며 아침을 먹으러 내려가니 어제 눈 인사만 교환했던, 순례자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일행 중 여자가 옆 테이블에서 인사를 건네온다.
하와이에서 왔다고... 그녀는 아이다. 곧 그녀의 남편 마이크와 그리고 친구라며 캘리포니아에서 온 딕을 소개시켜 준다. friendly한 아이다 부부와 달리 딕은 깐깐하고 완고한 백인 노인의 분위기를 풍긴다. 얼핏 딕의 목에 장치가 보였지만, 그냥 무심히 보아 넘겼다.
아이다와 마이크가 먼저 나가고, 내 존재에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아 보이던 딕이 말을 건넨다. 오늘 어디까지 가냐고... 목적지를 말하니, 어느 길로 가는 게 좋고, 알베르게에 머물 거라 했더니 좋은 알베르게를 알려준다. 그리고 혼자 왔느냐고 물어 그렇다 했더니, 유난히 부러워한다. 혼자 왔다면 좀 측은해 하거나 걱정스러워 하는 게 보통이라 그의 반응은 너무 예상 밖이다. 딕은 3년 전에도 카미노를 걸었다고 한다. 그래서 어떻게 또 왔냐 했더니, long story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말을 덧붙인다. 순간 흠짓... 뭐라 말해야 좋을지 몰라, Do you think? 라 하니, It is... 라고 대답한다, 담담하고 단호하게... 그렇게 생각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그렇다는 뜻인 것이다.
새삼 그의 목에 감긴 관과 그것에 이어진 배 위로 불룩 솟아있는 장치가 더 선명하게 보인다. 엉엉...
아까 아이다와 마이크는 딕의 여행에 보호자로 따라나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딕이 걸을 수 있을 만큼 같이 걸어주고, 마을에 호텔이 있으면 그곳에서 묵고, 그렇지 않으면 가장 가까운 호텔로 택시로 이동해 묵고, 다음날 다시 택시로 어제 걸었던 곳으로 가서 다시 걷고... 그렇게 카미노를 하고 있다고... 하지만 웬만하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싶은 나는 아이다 부부의 입장에서 참 아름다운 이야기라고만 생각했지, 딕의 입장에서 회복에 대한 기대를 접은 상황에서야 할 수 있는 선택이라는 것에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순간 모든 구슬이 다 꿰어진 듯한 느낌이 들며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진다. 그렇다고 눈물을 보일 수는 없는 일... 애써 호들갑을 떨며 아무렇지 않은 척 순간을 모면했고, 다행히 아이다와 마이크가 와서 딕을 부축하고, 내게 Buen Camino를 전하며 떠났다.
딕이 그렇게 떠나고 갑자기 접시 위의 음식을 먹는 행위가 너무 낯설다. 세 접시는 먹고 출발하겠다던 다짐을 실현할 수가 없다. 멍하니 앉아있다, 그를 한번 안아줄 걸 하는 생각이 든다. 태연한 척 애쓰느라 아무 말도 못하고, 한번 안아주지도 못하고 그냥 보낸 것이 너무 속상하다.
그들은 오늘 O’Cebreiro까지 간다 했었다. 높이를 고려하면 36km를 걸어야 닿을 수 있는 곳이다. 갈수 없을 것 같은데, 그래도 가고 싶다. 원래 두 시까지만 걷고 만나는 알베르게에 들어갈 생각이었는데...
머리 속엔 온통 딕을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다시 만날수 있을까 생각하며 걷고 있는데, 불독 아저씨가 보인다. 아저씨는 나보다 전 마을에서 출발했는데, 벌써 나보다 앞서 걷고 있었던 거다. 아저씨가 날 보더니, 아시아의 태양이 날 비추네 한다.... 아시아의 태양이라니요... 그건 보아지요, 아니 별이라던가...^^ 너 어제 다음 마을까지 간다고 하더니, 가긴 간 거니? 오늘 좀 늦었다 하며 농담을 건넨다. 내 마음을 그가 알아야 할 이유는 없으니 그게 바로 내가 하려던 이야기라고, 7시 반에 일어나 8시 반에 밥 먹으러 가서 한 시간을 먹었다며 아무 일 없는 척 너스레를 떠니, 그런데 오늘도 망고는 가져왔지? 한다. 어제 망고를 얻어먹기도 했지만, 매일 못 본 척 하더니, 요즘 매일 망고 깎아서 통에 넣어 가지고 다니는 것을 봤던 모양이다. 어제 슈퍼가 없어서요.. 했더니, 무슨 소리냐, 나는 저기 다리 건너 참에 있는 슈퍼에서 장을 봤는데 한다. 아 거기 있었어요? 그래도 어제 일요일이라 다 닫았을 텐데요 했더니, 그런데 너 가야 하지 않니, 안 가도 되면 나랑 더 있어도 되지만... 한다. 본인이 세운 것 아니었나? 나 놀려먹는 데 재미 붙였나 보다. 당연히 가야 하죠.. 하고 다시 걷기 시작... 그런데 마음이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가다가 초록 화살표를 따라 좌회전을 하니 어느새 따라온 불독 아저씨가 뒤에서 그게 아니지 한다. 아저씨가 가라는 길로 가다 보니 애초에 가려던 산길이 아니라 딕이 권했던 편한 고속도로 길을 따라가게 됐다. [비야 프랑카 델 비에르소를 나서면 길이 세 갈래로 나뉜다. 가장 북쪽 길부터 camino alternative, camino official, camino hard-core. 세 번째 hard-core는 원래 이름이 아니라 내가 붙인 이름이다. 완전 산중 험한 길이라고 한다. 나는 원래 가장 북쪽 길로 가려던 거였다, 조용하다 해서. 그러려면 오른쪽으로 갔어야 했는데, 늘 그렇듯 좌우가 헷갈려서... 불독 아저씨가 아니었으면 그날 난 살아서 그 길을 벗어날 수 있었을까? ^^]
알폰소를 만나 간만에 짧은 이탈리아어 수다를 즐기며 가는데, Y가 보인다. ... 나도 모르게 그녀를 향해 뛰어갔다. 그녀를 떼어냈다는 자책감이 있었는데 그녀가 무사히 걷고 있다는 안도감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알폰소는 자기를 버리고 다른 사람에게 뛰어갔다고 삐쳤고, 나는 이제 내 카미노는 망한 것이 아닐까 절망에 빠졌다.
이래저래 심란한 마음으로 걷다 보니, 이 길을 걷겠다고 온 것 말고, 뭐든 이 길 위에서 내 뜻대로 이루어진 게 있었던가, 그냥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두자 하는 생각이 든다.
이 길에 진짜 독일 사람이 많다. 그 중에 키는 전봇대처럼 크고 얼굴이 금방 붉어지는 착하디 착한 클라우디오. 한국사람이냐며, 얼마 전에 만난 한국사람이 자기 이름을 한글로 일기장에 써주었다며 들고 나온다. 일기장을 보니 날씨가 어땠는지 그림일기처럼 해, 구름, 비를 그려두었고, 비가 얼마나 내렸는지, 날씨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다 표시되어 있다. 만난 사람들의 이름도 정확히 다 기록해두고... 날짜에 해당하는 칸이 있고, 해당 칸에 넘치게 쓸 게 많은 날에는 뒤에 어디로 이어지는지 잡지처럼 표시를 해두었다. 글씨는 얼마나 단정한지... 뭐냐, 공무원이었냐 하니, 건강보험공단에서 일했단다. 역시... 그래서 그렇게 정확하구나 했더니, 예전에는 그랬는데 지금은 그냥 행복하려고만 한단다. 그리고 그의 여행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눈시울을 붉히며 말한다. 부인이 2년전 암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녀가 떠나고 보니, 그녀가 인생의 전부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그리고 마음이 늘 너무 슬퍼서 행복해지고 싶어서 여행을 시작했다고... 그래서 행복하냐고 물으니, 행복하기 위한 출발은 한 것 같다고 말한다. 그래도 언젠가 네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말은 할 수가 없다. 아무리 기원이고 위로의 말이라지만,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서... 그저 네가 원하는 것이 내게도 일어나길 바라고, 그럴 것이라고 했다. 간절한 사람들이 있다. 내게는 무엇이 그렇게 간절할까? 어딘가에서 간절함을 잃은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