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6/2008
산티아고 가는 길: 32: Foncebadón까지
피레네 정상 고도가 1450m였던 것을 생각하면 많이 올라왔다. 폰세바돈은 해발 1400m가 넘는 곳이다. 햇볕은 따가운데, 바람이 차서 춥다. 며칠을 두고 오른 높이라 크게 힘든 경사는 아니었어도, 27km를 걸었으니 오래 걸었다. 바에서 쉴 것 쉬면서 2시 10분에 목적지에 도착했으니 장족의 발전을 한 것은 분명한데, 마술에 걸린 첫 날이라 그런지 몸이 어찌할 줄을 모른다. 춥다가, 조금 따뜻한 곳에 오니 덥다.
아무리 길 떠난 방랑자라지만 마술에 걸린 나를 이렇게 대접하려 하지 않았는데, 뜻대로 되지 않는다. 이곳은 알베르게 말고 다른 선택이 없다. 하루만 빨랐더라도 아스토르가 별 세 개 호텔에 머무르게 해줬을 텐데... 아스토르가에서 하루 더 머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는데, 레온에서 쉬고 며칠 되지 않아 또 머무르는 건 옳지 않다 싶었다. 어제도 오늘도 게으르고 싶은 마음을 이겼더니... 그러면 상을 받는다고 배웠던 것 같은데... 마음이 내키는 대로 했어야 했던 걸까...
내일도 28km를 걸어야 할 상황인데 몸이 견뎌낼지...
[게으름에 대한 내 인식에 오류가 있었고, 지금도 있는 것 같다. 레온 호텔에는 편안함을 누리고 싶은 마음이었고, 아스토르가에서는 문화유산을 더 감상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걸어 산티아고까지 가는 게 목적었던 건 맞지만, 편안함을 누릴 기회가 있으면 누리고 몸을 회복하는 게 맞았고, 길의 역사와 문화를 즐기고 싶은 게 게으른 마음은 아니었다.]
이곳은 산 중턱에, out of nowhere이라는 말이 튀어나올 만큼 황량한 곳이다. 사람이라고는 하나 밖에 없는 바와 알베르게에서 일하는 사람을 제외하고 순례자들 밖에 없다. 알베르게는 3곳이나 있다.
다 스러진 집들의 돌 벽... 파란 하늘, 풀밭의 양들. 애처로운 눈빛으로 사람들을 바라보던 양... 아마도 지나고 나면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곳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거짓말처럼 꿈길 같은 꽃길을 걸어 도착한 곳. 아마 꿈처럼 기억되고 어느 날 문득 꿈처럼 그리울 것 같다.
바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다. 사냥을 일삼던 시절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속 어느 집의 다이닝 홀을 연상시킨다. 여기저기 가죽이 걸려있다. 주인 아저씨로 보이는 사람은 얼굴을 덮은 수염에 가죽 조끼를 걸친 것이 꼭 그 시대의 사냥꾼처럼 보이기도 하고... 돌 바닥, 돌 벽, 천정. 어느 곳 하나 예사로워 보이지 않는다. 내가 묵기로 한 알베르게도 완전 히피 분위기인데...
오늘은... 에레코를 만나 점심 먹으며 스페인어 수업(?)을 듣고, 핑크 아주머니가 드디어 탈이 나셔서 하루를 아스토르가에서 쉬게 되었다는 소식도 듣고, 부러운 커플 중 하나인 윌과 그녀의 남편을 만나고...
몸이 좋지 않은 탓인지, 알베르게 분위기가 영 심난해서 그런지,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어서 하나 밖에 없는 바에 와서 와인 한 잔 놓고 그냥 앉아 있는데, 그런 내 마음이 보이는지, 인사도 나눈 적 없는 순례자 아저씨가 아는 사람마냥 어깨를 툭 치고 가고, 사비나는 오더니 저녁을 같이 하자고 한다. 그녀도 인사만 했지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었는데... 이게 까미노지... 만난 적 있고 없고가 뭐가 중요해. 위로를 전하고 싶으면 그냥 전하면 되고, 이야기 하고 싶으면 그냥 하면 되고, 밥 같이 먹고 싶으면 같이 먹으면 되고... 그녀는 루프탄자 승무원이란다. 영어는 당연히 너무 잘하고, 차림새도 흐트러짐 하나 없이 비현실적이다 싶을 정도로 단정하다. [사비나는 그날 저녁 Knight Templar 등 길에 관해 여러 이야기도 해주고, 심란한 마음을 많이 달래주었는데, 이후로 볼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