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7/2008

산티아고 가는 길: 33: Ponferrada까지



오후 4시까지 경사길을 27km나 걸었다. 오는 길에 표지판에서 본 호텔에 무조건 체크인. 어제 주지 못한 선물을 주기로... 점심시간 끝나기 10분 전인데 밥을 주겠단다. 점심 겸 저녁을 맛있게 먹고 올라가 쓰러져 있다가 빨래하고 씻고 나오니, TV에서 힐러리가 경선 중단 연설을 할 장소로 이동하는 장면이 나온다. 물만 후다닥 사서 들어와 연설을 들으리라... 그게 그렇게 듣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알아들을 수 있는 TV를 보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반가웠을 뿐... 그런데 후다닥 물만 사가지고 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일주일 만에 레슬리와 마이클을 만났고, 몸이 아파서 잠시 걷지 못했던 그들과 인사만 하고 헤어질 수는 없는 일. 그리고 그들이 크레덴시알에 도장 받으러 간다기에 따라 나섰다가, 그 앞에 Knight Templar가 남긴 폰페라다 성이 있어 성 안에 들어갔다.

사소한 일이지만 어찌나 생각대로 되는 일이 없는지... 힐러리의 경선 중단 연설 보다는 그들의 안부가 중요하고, 도장 받는 게 중요하고, 폰페라다 성이 중요하지... 원래도 생각대로 뭘 밀고 나가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길을 걷기 시작하고 더욱 생각대로 되는 일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원래 예정되어 있던 일들이 일어나고 있을 뿐... 하지만 연설 대신 고성을 보았고 고성 안에서 강이 흐르는 폰페라다의 전경을 보았고, 성안에서 시원한 그늘을 조용히 독차지하고 즐겼다. 내 생각대로 되지 않은 게 나았다고나 할까...^^

걷기 초반에는 길이 아름다워 힘겨운 걷기를 격려하고 보상했다. 차츰 걷기도 익숙해졌고, 잘 걸을 수 있으니 발걸음도 빨라졌다. 그런데 걷기가 익숙해졌다고 통증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계속 아프고 계속 힘든다. 그러니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고 싶고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그 순간을 지나면 뭐든 나쁜 것은 다 잊는다. 상처로 남지도 않고, 흉터를 남기지도 않는다.




Cruz del Ferro(철의 십자가)에서...
마침 에레코와 함께 있어서 emotional한 순간을 잘(?) 넘길 수 있었다. 에레코는 배낭 옆 주머니에서 작은 돌을 꺼내 던졌는데, 무엇이 담긴 돌이었는지는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정말 착하고 좋은 청년이지만, 그 나이의 예민함과 vulnerability를 기억하기에 말하지 않는 것을 묻지는 않는 걸로...

십자가 언덕을 내려와 바에서 윌을 만났다. 윌은 엄마가 50년전에 알프스에서 주워 간직하셨던 돌을 남겨두고 왔단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자신이 그 돌을 간직하고 있었다고... 이야기를 듣는데,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지기 전에 내 눈시울이 먼저 붉어진다. 나는 아무것도 가져온 것이 없었다. 무게도 무게지만, 남기고 싶은 것이 없었다. 그런데 돌을 던지는 에레코를 보니, 엄마가 아끼는 돌이 떠올랐고, 그걸 들고 올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윌은 내 마음 속에 떠올랐던 것을 했고, 나는 십자가 언덕을 내려와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