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2/2020

시칠리아 여행: 14: 시라쿠자: 흔들린 저녁...



계획 없이 쉬엄쉬엄 다니겠다더니 계획 없이 다닌 것만 맞았다. 한번 시작하면 도대체 멈춰지지 않는다. 지금까지 이런 여행은 없었다. 피곤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의지를 발휘하면 계속 힘을 낼 수 있는 것이 신기하다.

점심도 안 먹고 돌아다녔다. 어제 저녁을 먹었던 카스텔로 피오렌티나가 피자 맛집이라고 하니 점심 겸 저녁으로 피자를 먹어야겠다. 아무리 시칠리아라지만 이탈리아인데 열흘 넘도록 피자를 안 먹은 건 좀 너무했다. 매일 탄수화물 폭탄 같은 아침을 먹다 보니 다른 끼니에 탄수화물 위주의 메뉴를 피하게 됐고, 그러다 보니... 

야외 테이블에 앉았다. 주문을 하며 어제 바가지를 쓴 것은 아닌지 확인하려 메뉴판을 꼼꼼하게 읽었다. 자릿세coperto도 있고 서비스 차지servizio를 20%를 붙인단다. 너무 하다 싶지만 다른 집을 찾을 의욕도 없고 피자가 맛있다니...


[카스텔로 피오렌티나의 문제의 피자]


식당 이름이 붙은 피자를 시켰다. 보따르가와 참치 등을 얹는다 했는데, 먹어보지 않은 스타일이라 시켜봤다. 피자의 양은 너무 많은데 내 입맛에 너무 짜다. 시킨 것이 아까워 꾸역꾸역 먹기는 했는데 반도 못 먹고 접시를 물렸다. 그런데 앞 테이블에서 피자를 먹던 아저씨의 눈치가 심상치 않다. 아까부터 계속 힐끗 거리기는 했는데, 그냥 내게 늘상 꽂히는 수많은 시선 중 하나라고 생각했었다. 그 아저씨가  내 접시를 치우러 온 웨이터를 불러 귓속말을 한다. 웨이터가 곤란한 표정으로 나를 힐끗힐끗 보면서 거절의 의사를 표현하자, 또다시 귓속말로 뭐라고 속삭였고, 결국 웨이터가 뭔가 수긍하며 내 접시와 그 아저씨의 접시를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곧 포장한 피자를 들고 나와 전달했다.

포장한 상자가 전달되는 순간 그 모든 게 이해됐다. 그 아저씨의 접시에는 싸갈 것이 없었다. 상자 안에 든 것은 내가 남긴 것. 으악... 열어보자고 할 수도 없고, 화가 버럭 났다. 내 몫을 가로 챈 것도 아니고 어차피 버려질 음식이었지만 화가 났다. 그리고 참담했다.

그렇게 까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그렇게 까지 하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참담함... 가져가고 싶으면 말을 하지, 왜 수근거리고, 왜 힐끗거렸냐고???  멀쩡한 차림으로 레스토랑에서 와인에 피자를 먹는 걸 보면, 집에서 애가 굶고 있어요, 며칠을 굶었어요 하는 상황은 아닐 거잖아... 남이 먹다 남긴 피자 반 판에 염치를 파는 비루함. 부끄러운 짓인 줄 알며, 그걸 이겨내는 뻔뻔함... 

눈곱 만한 이익에 염치, 품위, 자존심 헌신짝처럼 버리는 사람들 많이 봤지만, 점잖은 척하며 건너편 테이블의 남은 음식을 슬쩍 싸가는 꼴은 난생 처음이고 너무 충격적이다. 화장실에 가는 대신 비닐봉지와 종이를 챙겨들고 버스 뒷 좌석으로 가던 모습보다 더 충격적이다. 네가 그걸 싸가는 사람의 심정이 돼 봤어? 라며 매정하다 비난한다 해도 나는 그 아저씨에 대해 화를 풀 생각이 없다. 누구 마음대로 내 피자를 인간의 존엄을 팽개치는 장면의 소품으로 사용하며 나를 그 장면의 목격자로 만드냐고???

시칠리아가 어떤 곳인지 잘 모르겠다. 멀쩡한 듯 하다가 사람을 기함하게 한다. 이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고 있는 걸까? 절대 열지 말아야 할 판도라 상자가 있는 걸까? 절대 한걸음도 더 들어가지 말아야 하는 걸까? 보여주려는 모습만 봐야 하는 걸까? 뒤로 뭐가 자꾸 보여도 못 본 척 해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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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 근처에 하드 모양의 젤라또를 파는 가게가 있다. 음식에 관한 한 엄청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이탈리아에서 하드 모양의 아이스크림은 매우 혁신적(?)이다. 형형색색 진열해 놓은 모양에 홀려 혹 했지만 두 번은 안 먹을 맛이다. 다 그렇게 하거나 하지 않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하드를 물고 충격도 가라앉히고 소화도 시킬 겸 가보지 않은 골목을 걸어보기로 했다.


[사라쿠자: 오르티지아. Chiesa del Collegio dei Gesuiti]


두오모 광장에서 시청 앞을 지나 via saverio landolina를 따라 걸으니 예쁜 가게들도 많고 레스토랑과 바도 많다. 예수회 교회chiesa del collegio dei gesuiti도 있는데, 문이 닫혀 있었다. 예수회 교회는 대체로 예뻐서 보고 싶었는데 지나갈 때마다 항상 문이 닫혀있었다.
 



한 도자기 가게의 도자기 도안들이 피카소를 연상시켰다. 점원에게 작가가 피카소를 많이 좋아하나 보다 라고 하니 시칠리아 출신 피카소의 제자가 만든 세라미케 데 시모네ceramiche de simone라는 공방에서 만드는 것들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가 직접 만드는 것이냐고 물었더니, 눈이 커지면서 그는 죽었고 그의 문하생들이 계속 만들고 있다고 한다. 엄청 장수한 피카소가 세상을 떠난 게 언제인데... 눈이 커지게 할 만한 무식한 질문이었다. ^^ 손으로 하나하나 다 그려서 만드는 작품들이라고 한다. 가로세로 20cm정도 되는 사각 접시가 120유로나 한다. 디자인이 독창적이고 색감이 좋기는 한데 많이 비싸다. 비싸든 싸든 모두 그림의 떡이다.


[오르티지아. 아르키메데스 광장 중앙에 있는 디아나 분수fontana di diana. 아레투사와 알페이오스가 더 선명하게 보인다.]


아르키메데스 광장piazza archimede을 지나 북쪽으로 좀더 걷다 서쪽 해변가로 나와서 해변을 따라 걸어 남쪽으로 내려오니 아침에 베스파가 서있던 아레투사 광장largo aretusa이 나온다. 곧 노을이 지겠구나 하고 광장 테라스 앞 벤치에 앉아서 기다리는데 아무래도 곧 질 햇빛이 아니다. 일몰 시간을 확인하니 한 시간도 더 남았다. 생각으로는 한적한 바닷가 테라스에 앉아 한가롭게 멍을 때리는 것이 너무 낭만적이지만, 현실은 해질 때까지 이렇게 있다가는 딱 통닭구이가 될 것 같다. 햇빛이 너무 눈부셔 책을 보든 일기를 쓰든 눈을 쓰다가는 시력을 잃을 것 같다. 선글라스를 쓰면 될 일이다라고 할 수 있지만, 난 답답해서 선글라스를 잘 못쓴다. 선글라스를 쓰면 세상이 아름답지 않다. 햇빛이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을 정도로 강할 수 있다는 경험을 하고 나서 언제나 챙기기는 하지만 꺼내서 쓰는 일은 거의 없다. 지금도 가방에 있지만 꺼내 쓰기 싫다. 조금 이르다 싶지만 숙소로 돌아가서 쉬기로 했다.
 

[오르티지아 풍경]


숙소로 돌아오니 조지가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휴양지에서 유유자적 민박집을 운영하며 여생을 보낸다는 것이 낭만적으로 들리지만 현실은 다를 수도 있겠다 싶다. 말년에 객지에서 홀로... 텃세는 없을까 싶기도 하고...

멀쩡히 잘 사는 사람을 자기 기준으로 불쌍한 사람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온 세상이 불쌍하다며 청승이 일상인... 철학이 없거나 자기 연민에 빠진 증거일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포장된 우월감이나 공격성의 다른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순간 조지를 동정했다. 조지가 내 생각을 읽었다면 기분이 좋았을까? 언짢았을 것이다. 너나 잘 살아, 어따 대고... 라고 말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아직도 머리 속에 개똥 같은 생각이 있고 그런 생각들에 마음이 흔들린다 싶다. 각자 나름대로 끝까지 도전하고 노력하고 살아내는 게 인생인 걸, 기회만 있으면 정신 줄을 놓고 청승을 떤다. 정신 차려... 하는 마음의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