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0/2020

시칠리아 여행: 13: 칼타지로네: 산타 마리아 계단 & 도자기



[칼타지로네 산타 마리아 계단]


파올라 숙소의 호스트가 내려준 곳은 칼타지로네caltagirone의 유명한 산타 마리아 계단scalinata di santa maria del monte 근처였다. 

하루 종일 화장실을 안 가는 날도 많은데 오늘은 이상하게 버스에서부터 생각이 났다. 그래도 웬만하면 참고 버티는데, 오늘은 가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신호가 온다. 탈 없이 여행을 하려면 몸이 보내는 신호를 무시하지 말아야 하는 걸 알고는 있다. 바를 찾아 비탈길을 오르는데 이 배낭을 메고는 가파른 마을 길을 몇 시간 동안 잘 오르내릴 수 있을 것 같지 않다는 신호도 온다.

눈에 띄는 바baby bar에 들어갔다. 볼일 보고 커피도 한 잔 마시고 짐 맡길 곳이 있는지 물었는데, 주인이 흔쾌히 자기가 맡아주겠다며 이층 창고로 안내해준다. 너무 고맙다.

칼타지로네는 피아짜 아르메리나에서 동남쪽으로 30km쯤 떨어진 멀지 않은 마을이지만 소속이 다르다. 피아짜 아르메리나는 엔나 주이고 칼타지로네는 카타니아 주에 속한다. 이 마을 역시 언덕 꼭대기에 형성되어 있고, 옛부터 도자기로 유명했고 지금도 유명하단다. 

이 마을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그리스인들이 들어오기 이전부터라고 한다. 근처에서 질 좋은 흙이 나서 정착 초기부터 도자기를 생산했는데, 초기 도자기는 유약을 바르지 않은 테라코타terracotta 형태였다고 한다. 이후 시칠리아를 점령한 아랍 세력에게 채색하고 유약을 발라서 굽는 마요리카maiorica 도자 기술, 특히 노란색과 파란색을 내는 방법을 전수받았고, 도자기 산업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천 년의 산업으로 성업 중이란다. [마요리카 제작 방식은 보통 도자기와 다르다고 한다. 보통 도자기는 애벌구이 후 유약을 바르고 마른 상태에서 안료로 도색을 하는데, 마요리카는 유약이 마르기 전에 도색을 한단다. 따라서 안료가 유약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구운 후에 그림과 바탕의 경계가 느껴지지 않고 유리같이 매끄러운 표면이 형성된다고. 또한 마르지 않은 유약에 그림을 그리는 게 숙련된 기술을 요하는 과정이고, 그렇게 생산된 도자기의 예술성이 높다보니 식기 보다는 장식용으로 많이 쓰였다고 한다. 시칠리아에서는 바닥 장식, 돔 장식 등에서도 많이 보였다.]

칼타지로네라는 이름도 '항아리의 성'이라는 뜻의 아랍어에서 유래했단다. 마을에 들어서면 이 마을에 대해 전혀 몰랐던 사람도 마을의 자랑이 무엇인지 금방 알 수 있을 정도로 도자기 가게뿐만 아니라 도자기 장식이 여기저기에서 눈에 띈다.



[칼타지로네 산타 마리아 계단]


이 마을에 와보고 싶었던 이유는 인터넷에서 본 scalinata di santa maria del monte라는 계단 때문이었다. 도자기로 장식된 계단이 하늘까지라도 이을 기세로 보였다. 산꼭대기 마을과 지금 시청 광장piazza del municipio 인근에 새로 형성된 아랫동네를 연결하기 위해 17세기에 만든 계단이라는데, 142개의 계단이 쭉 직선으로 이어져있다. 처음에는 도자기 장식도 없었고 중간중간에 층계참이 있었다고 한다. 계단의 수직면을 장식하는 타일 장식은 1606년에 완성됐고 19세기에 변경되었단다. 어떤 책에는 타일이 1956년 추가된 것으로 나온다. 글쎄... 그런데 계단 입구 표지판에는 17세기에 시작됐고, 20세기 중반에 다시 만들어졌다고 쓰여있다. 살짝살짝 다른 이야기가 불편하다. 때때로 나는 이런 사소한 모순을 못 참고 진상(?)을 밝히겠다며 목숨을 건다. 그런데 계단이 어떤 역사를 통해 지금 내 눈앞에 있게 됐는지가 그렇게 중요할까?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다 잊을 것을... 진정하고 관광객답게 그러려니, 아, 예쁘다 정도만 하는 걸로...

계단 수 많큼 142개 층의 타일이 있다는 이야기인데 같은 무늬가 하나도 없다. 얼마든지 비슷해도 되지만 절대 같아서는 안 된다는 철학이 있는 것 같다. 서로 창의적으로 다르지는 않아도 같은 것은 없다. 계단 양쪽으로 건물도 있고 골목도 있다. 언덕 위에 있는 마을이다 보니 비슷한 계단 골목은 많은데 도자기로 장식된 계단은 산타마리아 계단 밖에 없는 것 같다. 타일 장식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대접이 하늘과 땅 차이다. 

내가 칼타지로네 시의원쯤 된다면 많은 다른 계단들도 다 도자기로 장식하는 프로젝트를 해보자고 할 것 같다. 그러면 칼타지로네라는 도시의 위상이 확 달라질 것 같다. 그릴 사람이 없다면 톰 소여처럼 5유로 내면 마요리가 체험하게 해주겠다고 꼬드겨서 그리도록... 나라면 그 꼬임에 당장 넘어간다... ^^


[산타 마리아 계단 꼭대기. 저절로 계단에 주저 앉게 만드는 풍경]

[산타 마리아 델 몬테 교회Parrocchia Maria SS. del Monte]

계단은 산 쥬세페 교회chiesa di san giuseppe 입구에서 시작된다. 손으로 그린 각기 다른 장식들을 구경하며 오르다 보니 금방 계단 끝이다. 계단 끝 오른쪽에 산타 마리아 델 몬테 교회parrocchia maria SS. del monte가 있고 계단 아래를 내려다 보면 시가지 전경이 보인다. 산타 마리아 교회 종탑에서 보는 풍경이 아름답다는데 교회 문이 닫혀있어 볼 수가 없다. 

계단 끝에 서서 아래 풍경을 보며 서있는데 이야기를 나누던 할아버지 두 분이 자꾸 내게 시선을 보낸다. 잘 됐다. 관심을 활용할 기회.^^ 멀리 보이는 종탑들이 궁금하던 차였는데, 무엇이냐고 물었다. 오른쪽 앞에 것은 성당의 돔과 종탑이고 더 뒤쪽에 있는 것은 프란체스코 교회chiesa s. francesco d'assisi의 것이란다. 이탈리아어 잘한다고 칭찬이 넘치신다. 못한다고 생각하는데 이렇게 칭찬을 받으니 진짜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계단 중간중간에 앉아서 풍경을 감상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나도 잠시 계단 꼭대기에 앉았다. 문득 시칠리아라 하면 마피아부터 떠올렸던 것이 미안해진다. 이렇게 다양한 모습이 있는데, 이렇게 특별한데, 이렇게 아름다운데...

도시 분위기는 완전히 바로크 분위기다. 내가 느끼기에는 시칠리아에서 내가 가본 도시는 어디나 할 것 없이 바로크 스타일이 압도적인 것 같은데, 이곳은 특히 더 주목을 받는 곳이다. 시칠리아에 ‘발 디 노토의 바로크 후기 도시들late baroque towns of the val di noto’이라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있는데, 1693년에 지진으로 폐허가 되어 바로크 스타일로 재건된 시칠리아 남동부에 있는 8개 도시(caltagirone, catania, militello val di catania, modica, noto, palazzolo acreide, ragusa, scicli)를 포함한다. 이곳도 그 중 하나다. 그러니 이곳에 1693년 이전의 모습은 거의 없다고 한다.

하지만 다른 곳도 바로크 스타일 말고 다른 양식이 있어? 라고 할 정도로 시칠리아에서 다른 고전 양식은 두드러지지 않는다. 어쩌면 바로크가 워낙 눈에 띄는 양식이라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바로크 양식 건축물이 따로 한두 개 있을 때는 너무 두드러져 호감을 느끼지 못했었는데, 시칠리아에서는 웬만하면 다 바로크 스타일이다 보니 익숙해졌는지, 너무 튄다는 인상이 사라졌다. 다른 양식이 뭐가 있었나 생각해보니 팔레르모의 아랍 노르만 스타일, 간간히 보이는 리버티 스타일이라고 하는 아르누보 계열, 카탈란-고딕 스타일, 르네상스 스타일... 그리고 하나 더. 마피아 스타일(? 내가 붙인 이름)... 옛날 집장사라고 불리던 사람들이 마구 지어 팔던 건물들과 비슷한, 오직 기능만 있는, 왠지 자재비 엄청 떼먹었을 것 같은, 날림이라는 단어가 어울려 보이는, 동네를 빈민촌 분위기로 만들어 버리는... 그런 스타일... 바로크 스타일이 압도적이라 했는데, 생각해보니 그건 관광객인 내가 찾아 다니는 역사지구의 이야기고, 역사지구를 조금만 벗어나면 제일 압도적인 스타일은 마피아 스타일이었다는 생각이 들어 씁쓸하다.



[트리나크리아]

[무어인의 머리]

[잣 송이]

계단을 내려오며 계단 양쪽에 있는 마요리카라고 불리는 도자기 가계들을 구경했다. 형형색색의 화려한 도자기들이다. 디자인도 용도도 다양하다. 그릇, 화병, 화분, 장식, 성물 등등. 시칠리아 상징인 트리나크리아trinacria를 모티브로 하는 장식품도 많고 태양, 무어인의 머리, 피끼딘디아, 잣 송이, 부엉이 등도 자주 눈에 띄는 소재다.

무어인의 머리 testa di moro에는 엽기적인 애증의 이야기가 얽혀 있다. 팔레르모 칼사 지구에 한 소녀가 살고 있었다. 어느날 소녀가 테라스에서 화분에 물을 주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지나가던 아랍인의 눈에 띄었다. 아랍인은 소녀의 모습에 반해 저돌적으로 사랑을 고백했고, 소녀는 그의 고백을 받아주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자는 중동에 부인과 자식이 있었고 곧 가족에게 돌아가기로 되어있었다. 소녀는 그를 보내고 싶지 않다. 소녀는 그가 잠든 사이 그의 머리를 잘랐다. 그리고 그 머리에 바질을 심어 자신의 곁에 두었다. 바질은 소녀의 눈물을 받아 무성하게 자랐다. 소녀의 무성한 바질이 부러웠던 동네 사람들은 자신들도 그렇게 풍성하게 키우려 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이 없자 소녀의 화분 모양을 본 딴 화분을 만들어 바질을 심기 시작했다...

잣 송이 모양의 장식도 많이 눈에 띄는데 다산과 번영의 상징이라 결혼 선물로 많이 주고 받는단다. 배낭 메고 다니는 처지라 뭘 사서 가지고 다닐 형편은 안돼서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사서 집으로 부치겠다 생각했었는데, 막상 사려니 신중해진다. 너무 다양해서 고르기도 어렵고, 디자인이 너무 화려해 집 분위기와 조화가 될지, 안전하게 배달은 될지 의문이 든다. 대충 후다닥 골라 살만큼 만만한 가격도 아닌데 급한 마음에 질렀다가는 후회할 것 같아 사진으로만 담자 했다. [안 산 것에 대한 후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