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쿠자 숙소. 산뜻한 느낌은 아니지만, 하트가 곳곳에...]
방금 5시 30분 알람이 울렸다. 어제 아침을 위해 설정해둔 알람이다. 오늘은 그렇게 일찍 일어날 필요가 없지만 알람 시간보다 30분이나 먼저 일어나 있었다. 어젯밤 들어오자마자 잤으니 9시부터 잤을 것 같다. 오랜만에 충분히 푹 잤다. 일어나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이 닦기. 눈을 뜨니 씻지도 않고 잠들었던 게 기억났다. 저녁 먹고 두오모 광장 한 바퀴 돌고 들어와서 던져 놓고 나간 가방을 푸는데 잠이 쏟아졌다. 옷을 갈아입다 씻는 게 뭐가 대수랴 싶어 오는 잠을 쫓지 않았다. 기차에서, 버스에서 아무리 정신을 차리려 해도 기절하듯 잠에 빠졌었다. 좀도둑 많은 곳이었다면 너무 위험했다. 자도 되는 상황이라면 잠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싶었다.
어제는 정말 긴 하루였다. 피아짜 아르메리나에서 버스 정류장을 찾느라 1차 소동이 있었고, 칼타지로네 AST 버스 직원들 덕분(?)에 2차 소동을 겪고 2시간이나 더 걸려서 시라쿠자에 오게 됐다. 기차 탈 생각을 못했더라면 4시간 더 걸렸을 수도 있었는데, 다행히 기차 생각이 나서 그나마 두 시간 빨리 왔다. 그러고 도착했더니 이번엔 호스트가 예약 상황을 착각해서 3차 소동이 있었다. 금방 착오를 발견해서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심란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어 지금쯤 짐을 싸느라 정신 없었을 수도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모면하고 있는 것 같다.
숙소를 옮기는 것이 생각보다 오버헤드가 크다. 많이 익숙해졌어도 여전히 긴장하고 잠을 잘 못 잔다. 시간도 많이 걸린다. 짐 싸고 푸는데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들고, 여유를 두고 움직여야 하니 애매하게 버려지는 시간이 많다. 체크인도 경우에 따라서는 시간을 꽤나 잡아먹는다. 또 낯선 공간을 편하게 만들거나 공간에 맞춰야 하는 것도 막상 해보면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다. 물리적으로 어렵다기 보다는 정신적 에너지가 필요하다. 물론 개인차가 있겠지만, 내게는 높은 심리적 장벽을 넘어야 하는 일이다. 낯선 생활 환경에 결국 적응을 하지만, 새 침대와 화장실을 써야 하는 상황을 어떻게든 회피하려 하고, 불가능하면 숨을 크게 쉬며 일종의 각오를 하는 과정을 아무도 모르게 겪는다. 이런 기질로 볼 때 유목민의 자손은 확실히 아닌 것 같다.
어제 저녁, 다른 곳을 알아봐 주겠다는 호스트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싶은 생각이 1도 없었다. 일단 새 숙소 적응 과정을 겪는 게 싫었고, 그러다 보면 반나절이 후딱 지날 것이기에 화가 치밀었다. 여행자에게 가장 귀한 게 시간인데... 나는 네 잘못으로 인한 조금의 불편·부당도 감수할 의사가 없으니, 네가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이었고, 또 그렇게 만들겠다는 의지를 발휘했었다. 물론 문제가 발생하자 싸늘하게 변하는 표정을 보며 나도 내 생각을 관철하겠다는 쪽으로 노선을 정했다는 핑계는 있다.
아무튼 푹 자고 일어났더니 정신이 드는지, 잘못한 건 없어도 그랬던 내가 자랑스럽지는 않다. 짐 싸들고 숙소 옮기는 것을 불편이라 생각하고 귀찮다고 할 것이었으면 한 달을 길에서 보내겠다며 짐 싸 들고 집 밖으로 나오지 말았어야 했다. 타협할 것은 타협하고, 잃을 것은 잃고, 감수할 것은 감수하는 의연함이 있어야 했다.
피아짜 아르메리나에서의 밤. 너그럽게 생각하며 마음을 지키는 사람이고 싶었다. 마음이 하루도 못 가 돌변한 이유를 생각해봤다. 불신이었다. 상대에게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으니 싸늘해지며 경우를 무섭게 따지는 사람이 된 거다. 인간에 대한 신뢰가 너무 많이 무너졌구나 싶다. 인간이 믿어줄 가치가 없는 존재라는 데이터가 너무 많이 쌓였다. 쌓인 데이터를 처리하는 현명한 알고리즘을 찾기 전에는 아무리 마음을 지키는 사람이 되고 싶어도 거울 같은 사람 밖에는 될 수 없겠구나 싶다.
바닷가 숙소는 침구가 깨끗해도 꿉꿉한 느낌이 있다. 에어컨을 제습 모드로 켜놓고 한참 있으면 뽀송해지는데 뽀송해졌다고 끌 수 없다. 끄면 빨래가 절대 마르지 않는다. 그러니 더운 곳이라도 항상 춥게 잔다. 추가로 구비되어 있는 담요를 덮기는 싫고... 짐을 챙기며 침낭을 넣을까 말까 고민을 하다 뺐는데 내내 아쉽다. 창문이 있어도 안뜰로 향해 있어서 건너편에 있는 방 사람과 눈 마주칠까 봐 마음껏 열지 못하는 것도 좀 답답하다.
오늘은 게으르게 보낼 생각이다. 아침 먹고 들어와서 한나절 자다가 오르티지아 섬이나 한 바퀴 돌아 볼까 싶다. 그런데 어제 지나온 섬 입구가 너무 유원지 같아 이 섬을 좋아하게 될 수 있을지...
오늘부터 바로크 투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어제부터 칼타지로네에서 이미 시작됐다. 발 디 노토의 바로크 후기 도시들late baroque towns of the val di noto이라는 이름으로 2002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시칠리아의 유적은 1693년 지진으로 폐허가 됐다가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된 8개 도시를 말한다. 칼타지로네caltagirone, 카타니아주의 밀리텔로militello in val di catania, 카타니아catania, 모디카modica, 노토noto, 팔라쫄로 아크레이데palazzolo acreide, 라구자ragusa, 시클리scicli 등이 속한다.
열흘 남짓한 기간 동안 이들 중 하이라이트로 꼽히는 도시들을 방문할 계획이다. 어제 갔었던 칼타지로네도 그중 하나지만 산타 마리아 계단과 마요리카 도자기가 너무 부각되다 보니 바로크 타운이라는 점이 뒤로 밀리는 것 같다. 시라쿠자는 발 디 노토val di noto 문화유산에는 속하지 않지만, 그 도시들과 같은 해에 지진으로 무너져 바로크 스타일로 재건됐다.
P.S.
발 디 노토val di noto는 아랍 통치시절의 구획 이름에서 유래했다. 발val은 아랍어에서 유래한 말로 주provincia를 뜻한다. 아랍인들은 시칠리아를 세 구역으로 나누어 서쪽은 발디 마짜라val di mazara, 북동쪽은 발 데모네val demone, 남동쪽은 발 디 노토val di noto라고 했다.
시라쿠자는 발 디 노토의 바로크 후기 도시들late baroque towns of the val di noto 유산에 속하지 않는 대신 판탈리카의 암벽 토굴 공동묘지syracuse and the rocky necropolis of pantalica라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속한다.
어제 밤 조지가 포스트잇에 손으로 쓴 메모를 아침 쿠폰이라며 주었다. 두오모 광장에 있는 바에서 사용할 수 있는데, 크루아상 2개, 음료 2개를 선택할 수 있다고 한다. 보아하니 오르티지아 섬 B&B의 아침 제공 스타일인가 보다. 쿠폰들고 아침 먹으러 온 사람이 나만은 아니다. 대 환영이다. 게다가 성당을 마주보는 바라니 더 바랄 게 없다.
아침 먹으러 나가며 조지에게 인사를 했더니, 본인도 커피를 마시겠다고 따라 나왔다. 내가 잘못한 것은 없어도 상한 감정을 전한 일이 마음에 걸려 어제 내가 예민했다고 미안하다고 하니, 자기가 잘못해서 그랬다며 괜찮다 한다. 불편한 마음을 털어내니 한결 편하다. 동네마다 바마다 다 운영 방식이 다르니 처음에는 어리바리하게 된다. 이곳은 직접 카운터에 가서 주문하는 것이 아니라, 테이블에 앉아 있으면 직원이 와서 주문을 받는다. 조지가 나서서 주문을 도와주더니 마시겠다던 커피는 안 마시고 손님을 맞아야 한다며 가겠단다. 잉? 뭐지? 커피 마시겠다고 하지 않았냐 하니, 다시 올 수도 있다며 간다. 뭐든 너무 궁금해하지 않는 걸로...
[오르티지아 두오모 광장과 대성당]
나는 마냥 신났다. 아침 광장은 어제 밤에 본 광장과 완전 다르다. 눈이 부시다. 광장을 에워싼 대리석 건물들과 넓은 광장 바닥에 쫙 깔린 하얀 대리석이 햇빛을 고스란히 반사하는 것 같다. 성당 옆면은 아테네 신전이던 시절의 기둥을 갈비뼈처럼 드러내놓고 있는데, 온전한 바로크 스타일 정면은 너무 곱다. 바로크가 이렇게 사랑스러운 스타일이었던가 약간 어리둥절한 기분... 그동안 바로크 스타일을 왜 싫어했었는지 이유를 모르겠는 느낌... 이렇게 한 건축가의 의도를 온전히 담고 있는 교회의 정면을 시칠리아에서 본 적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도 든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까지 본 교회는 조각보처럼 조각조각 변천사를 담고 있었다. 이곳도 수천 년의 역사가 쌓여있지만, 적어도 정면만큼은 일필휘지의 느낌이다. 그림같이 예쁜 광장에서 아침을 먹고 있다니... 꿈같은 일이다. 이곳에서 계속 아침을 먹을 것이란 말이지... 웃음이 절로 난다.
조지가 곧 다시 왔다.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이기는 한데, 벌써 볼일이 끝났다고? 하는 타이밍이다. 약간 도깨비 같은 스타일인가? 무엇을 할 계획이냐고 묻는다. 그동안 너무 메뚜기같이 뛰어다녀서 오늘은 그냥 아무 계획 없이 오르티지아 섬에 있을 예정이라고 하니, 다닌 곳을 묻는다. 그래서 쭉 나열하니, 자기가 1년동안 다닌 것보다 더 많은 곳을 다녔다고 한다.^^ 투어버스 지도를 펼쳐서 여기 저기 설명을 해준다. 시칠리아 사람이냐고 물으니 베네토 지방 무슨 호숫가에 있는 마을 출신이란다. 시칠리아에는 B&B를 하려고 1년 전에 왔단다. 원래 여동생이 하고 싶어 했는데,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어머니를 돌보게 된 여동생이 대신 먼저 가서 문을 열고 자리를 잡고 있으라 해서 내려오게 되었단다. 은퇴하고 유구한 역사가 살아 숨쉬는 아름다운 휴양지에서 B&B을 한다... 낭만적인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