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타지로네 기차역. 기차역 옆에 버스 터미널이 있다]
피아짜 아르메리나에서 출발해서 칼타지로네를 거쳐 시라쿠자에 도착해 하루를 마무리하기까지 긴 사연이 있었던 것을 보면, 그날 받았던 은혜가 하루치를 초과해서 초과분을 상쇄할 무언가가 필요했었던 것 같다. [대한민국 대도시 기준으로 생각하면 저런 걸 은혜라고 표현해도 될까 하는 일들...]
아침에 피아짜 아르메리나에서 버스 정류장을 찾느라 약간 (언제나 지나고 나면 별것 아닌 게 된다)의 소동이 있었지만, 칼타지로네에서 파올라에게 차도 얻어 타고, 무턱대고 들어갔던 바에서 배낭도 맡아주고 택시도 불러주고, 뭔가 술술 풀리는 날 같았다.
바 사장님의 친구가 버스 터미널에 내려줄 때만 해도, 오늘의 시련은 피아짜 아르메리나에서 버스 정류장 찾는 것으로 끝났고, 칼타지로네에서 만난 인연들이 베풀어준 따뜻하고 훈훈한 마음으로 하루가 끝날 줄 알았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라는 말이 야구경기에서 나온 말이라지만 세상 만사에도 매우 유효한 표현이다. 한치 앞에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가봐야만 알 수 있다.
바 사장님 친구 커플과 작별인사를 하고 매표소로 갔다. 시라쿠자 행 버스표를 달라고 했더니 시라쿠자까지 가는 버스가 없으니 카타니아에서 갈아타야 한다고 한다. 버스 표도 카타니아 행 밖에는 발매가 안되니, 카타니아 중앙역에서 내려 시라쿠자 행을 표를 사야 한단다.
갈아타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아침에 파올라가 버스기사에게 내가 오늘 시라쿠자에 갈 거라고 했더니, 기사가 11시에 버스가 있다고 했었다. 나는 9시 반에 도착하는데, 뭐래 하고 말았는데, 파올라가 흥분하며 어떻게 11시에 가라는 거냐며 흥분했었다. 내 일에도 자기 일처럼 욱해서 귀여운 구석이 있네 했었다. 아무튼 내가 2시에도 버스가 있더라 했더니, 갈아타야 하는 버스라고 했었다. 버스만 있다면냐 갈아 타는 게 뭐가 대수랴 하고 말았다.
표를 사며 매표원에게 갈아타야 할 시라쿠사 행 버스 시간을 적어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창구 밖으로 나와 벽에 붙은 시간표를 가리키며, 갈아탈 시간이 30분이나 있으니 걱정하지 말하고 한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그가 가리키는 시간표는 시라쿠사 행이 아니다. 아무래도 미심쩍어 인터넷을 검색해서 휴대폰 화면을 보여주니, 갑자기 자신이 보여준 것은 다른 시간표라며 버스 시간을 적어 준다. 헐... 조금 전에는 왜 그런 건데? 게다가 말도 달라졌다. 갈아탈 시간이 30분에서 15분으로 줄었다. 검색 화면은 분명 갈아타는 곳이 공항이라고 써있는데 자꾸 중앙역에서 갈아타면 된다고 한다.
매표소 직원은 내게 신뢰를 완전히 잃었다. 그래서 버스 기사에게 다시 확인했는데 환승 장소가 중앙역이 맞는단다. 인터넷 정보와는 달랐지만 매표소 직원과 기사 모두 그렇다는데 그렇겠거니 하고 자리를 잡고 앉았다.
버스 안에서 창밖 풍경을 찍으니 앞자리의 앞좌석 아저씨가 뒤돌아보며 칼타지로네에는 3개의 언덕이 있단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두 개의 언덕은 올랐던 것 같다. 산타 마리아 계단이 있는 언덕과 성 프란체스코 교회가 있는 언덕이 그 둘일 것 같다. 뒤에 앉은 할아버지는 저 아래로 보이는 것이 지중해란다.
물론 의사소통이 원활하지는 않지만 계속 얼굴을 마주하며 듣고 있으면 신기하게도 결국 무슨 뜻인지 알게 된다. 버스 안에 이방인에게 뭐든 알려주고 싶어하는 정겨운 마음이 넘친다. 곧 넓은 들판이 펼쳐진다. 이 작은 섬의 들판에서 아프리카의 광활함이 느껴진다. 온도로만 보면 30도를 오르내리는 한여름인데 들판 풍경이 추수를 끝낸 듯 황량하기 그지없다. [이 때는 몰랐는데 시칠리아의 경작 시즌은 가을에 시작된다고 한다. 추수를 끝낸 것이 아니라 파종을 위해 준비된 모습이었을 것 같다.]
좀 졸다 눈을 뜨니 왼쪽에 넓은 들판에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홀로 솟은 산이 보인다. 봉우리 주변에만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있다. 멀리 있어도 장엄해 보인다. 딱 봐도 에트나다. 앞의 아저씨가 뒤를 보며 에트나라고 말해주신다.^^ 누군가에게는 꿈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일상이다. 들판에서 연기처럼 아지랑이처럼 뭔가 피어 오르는 것이 보인다. 지열의 열기나 온천의 수증기일지도...
앞 좌석 아저씨가 이번엔 뭔가 가리키며 아메리카나라고 한다. 뜬금없는 단어다. 다시 가만히 들어보니 미군용 공항과 캠프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용산 인근 미군부대 주변의 분위기를 풍긴다. 넓디 넓은 들판 주변이 다 미국 땅이란다. 헐~ 미국... 미국 땅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리스, 아랍, 비잔틴, 로마, 노르만, 스페인 등 온갖 유럽 세력... 그리고 뒤를 이은 미국’의 뜻은 아니길...
버스는 사회 기간 시설 특유의 분위기를 풍기는 지역을 지나며 카타니아 공항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다. 기사에게 나도 여기에서 내리냐고 물으니 아니란다. 구글 지도를 보며 왔으니 중앙역이 아니고 공항인 것은 나도 안다. 길을 잘 몰라도 되고,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나 길을 물어도 되고, 같은 것을 묻고 또 물어도 되는 것은 관광객의 특권이다. 그 질문은 관광객의 특권을 가장한, 진짜 중앙역에서 내리는 것이 맞는지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질문이었다.
공항에서 중앙역까지 가는 길은 시칠리아에서 가장 혼잡해 보이는 길이었다. 항만 시설의 심란함까지 더해져 내가 며칠 후에 이곳에 와야 한다는 현실이 반갑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뜻하지 않게 미리 카타니아를 만나는 것이 싫었다. 이곳에 딱 떨어진 순간인 지금이 이곳 여행의 시작이어야 하는데, 며칠 후 다시 와서 시작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붓그리기 경로를 만들기 위한 내 노력이 무산되는 순간이라는 깨달음이 오며 속이 상했다.
역에서 내렸다. 매표소는 터미널과 한참 떨어져 있다. 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아가씨가 방향을 잡아준다. 이삼백 미터는 되지 않을까 싶다. 버스 회사마다 자기 매표소가 있는 눈치다. [도시마다, 버스회사마다 그때 그때 다르다.] 한참을 걸어 매표소에 도착해 시라쿠자 행 버스표를 달라고 하니, 버스가 15분전에 떠났고 다음 버스는 6시에 있다고 한다. 칼타지로네 인간들의 말에 의하면 바로 버스가 있어야 한다. 이 상황을 믿을 수가 없어 몇 번을 물어도, 6시 버스가 다음 버스란다. 15분 차로 버스를 놓치다니... 다음 버스는 2시간 반을 기다려야 하다니... 그 버스 시간 맞추겠다고 박물관도 못보고 택시 타고 그렇게 왔건만...
너무 어이가 없으면 감정이 작동을 멈춰 오히려 차분해진다. 일단 표를 사고 매표소를 나왔다. 두 시간 반이 있기에 일단 바에 들어가서 쉬며 생각을 해보자 싶었다.
[왼쪽은 6시 5분 버스의 여정. 오른쪽은 2시 10분 버스의 여정. 버스 아이콘은 환 정류장 표시]
가만히 앉아 있다 보니 계속 뭔가 개운하지 않았던 상황이 이해된다. 버스회사 홈페이지 정보가 정확했던 거다.
시라쿠자 행 버스는 중앙역에서 출발해서 공항을 들러 시라쿠자로 가고, 내가 타고 온 버스는 공항을 들러 중앙역으로 오는 것. 내가 탄 버스가 공항에 도착한 시간에 시라쿠자 행 버스는 중앙역을 출발해서 공항으로 오고 있었던 것.
공항에 내려 표를 사서 갈아 타면 시간이 딱 맞는 것인데, 망할 것들이 중앙역에서 내려야 한다고 하는 바람에 버스를 놓친 것이었다. 빌어먹을 것들이 내가 웹사이트를 시간표를 보여줬는데도 공항이 아니라 중앙역이라고 우겼던 거다. 환승할 시간도 5분 밖에 없는데 알지도 못하며 아무 말이나 한 것이었다. 나도 이제서야 검색 창에 표시된 정보가 다 이해된다.
화면 밑에 시간이 빨간색인 코스는 갈아타야 함(In ROSSO orari con corse in corrispondenza)이라고, 빨간색을 주의할 것을 강조하며 쓰여 있었고, 이해하지 못했던 버스 아이콘의 의미도 화면 아래쪽에 설명이 되어 있었다. 선택된 목적지는 다른 코스로 갈아타야 다다를 수 있다고, 각 코스는 따로 표를 사야 한다고... 엉엉... 화면을, 활자를 주의해서 봤다면 미리 알 수 있었는데, 대충 봤던 거다. 중앙역에서 내리라던 AST버스 직원들도 한 대 때려주고 싶지만 나도 한 대 맞아야 할 것 같다.
현지인 말에 혹해 골탕을 먹는 게 연 이틀 동안 벌써 세 번째. 한 번 속으면 실수고, 두 번 속으면 바보고, 세 번 속으면 공범이라는데... 공범까지는 모르겠지만, 바보는 확실한 것 같다. 세상 누구도 아닌 너 자신을 믿으라는 메시지를 계속 보내주는 것 같은 어떤 존재에게 많이 미안해진다. ㅠㅠ
시칠리아에서 기차보다는 버스가 믿을 만하다고 하던데, 내 생각은 완전 다르다. 기차가 있기만 하면 훨씬 더 빠르고 믿을 만하다. 버스 정류장과 매표소를 찾아 헤맬 필요도 없다. 시라쿠자-카타니아 구간에 기차가 (시칠리아 기준으로) 자주 있었던 게 생각났다. 찾아 보니 4시 48분 기차가 있다. 6시쯤이면 시라쿠자에 도착한다. 기차를 타기로 하고 버스표를 물르겠다는 이탈리아어 표현을 번역기로 찾아보고 매표소로 향했다.
창구에 할아버지가 있다. 말로 했더니 못 알아 듣는 척 한다. 번역기를 직접 보여주니, 물려줄 수 없단다. 절대 안 된단다. 절대라니, 세상에 절대가 어디 있어... 하지만 이렇게 나오리라 예상했다. 한 밤중에 낯선 도시에 도착하느니 버스 비를 날리는 것이 낫다 생각하며 날릴 각오를 했던 상황이라 열이 올라오지는 않는다.
잠시 그냥 서있었다. 고이 나가줄 일은 아니라 어떻게 마무리를 짓고 나가야 할까 생각하며... 그랬더니 할아버지가 몸을 돌려 뒤에 앉아있던 아저씨 눈치를 한번 본다. 아까 내게 표를 팔았던 아저씨였는데, 할아버지보다 한참 어려보인다. 눈이 마주치자 아저씨가 인상을 한 번 구기며 고갯짓을 한다. 순간 할아버지가 갑자기 내게 표를 달라고 한다. 그러고 돈을 돌려준다.
그 둘 사이에도 말 한마디가 없었는데... ‘절대’ 안 된다던 할아버지는 갑작스런 태도 변화에 대한 일언반구의 설명이 없다. 만만히 보고 등쳐먹으려던 이방인 앞에서 속된 말로 스타일을 완전 구겼는데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고약한 노인이 밉기 보다는 먼저 눈치를 살피고 말하지, 왜 말을 먼저 해서 이런 수모를 당하세요 라고 위로를 건네고 싶었다. 그리고 세 글자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마·피·아. 평범한 조직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인상과 고개짓만으로 누군가 보는 앞에서 몇 십 년 윗 사람의 위신을 땅바닥에 쳐박으며 제압하는 위계가 존재할 수 있을까?
시칠리아는 이상하다. 누가 내 마음을 들여다 보고 있는 것 같다. 하필 오늘 불과 몇 시간 전 칼타지로네 산타 마리아 계단 꼭대기에서 시칠리아 하면 마피아를 가장 먼저 떠올렸던 것에 대해 매우 미안하게 생각했었다. 시칠리아에 오기 전에는 마피아라는 존재가 너무 겁이 났었지만, 와서는 오히려 험악한 분위기의 흑인 때문에 무서웠던 적은 있어도 마피아의 위협은 눈곱만큼도 느껴본 적이 없다. 계기가 있어 몇 번 그 존재가 떠오르긴 했지만, 골똘히 생각할 시간도 정신도 없었는데, 친절한 사람들과 아름다운 풍경에 뜬금없이 그런 생각이 들었었다. 그런데 바로 그날 마피아가 아니고는 설명이 안 되는 장면을 목격하니, 뭔가 싶다. 진짜 이상하다.
카타니아 역 일대는 시칠리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 때 시칠리아 하면 떠오르던 이미지 딱 그대로다. 왠지 끈끈하게 느껴지는 바람. 햇빛이 눈이 부신데도 왠지 모르게 어둡고 어수선하다. 카오스 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8일 후에 다시 올 곳인데 그때는 이 느낌이 어떻게 바뀔지 궁금하다.
기차표를 사며 시간을 거듭 확인했다. 플랫폼 번호 확인하고 벤치에 앉아서 옆에 앉아있는 청년에게 맞는지 묻는다. 기차를 탈 때도 옆의 아가씨에게 또 묻는다. 묻고 묻고 묻는다. 덕분에 이탈리아어가 일취월장 하고 있다.^^ 듣기 연습은 목청껏 수다떨기 좋아하는 사람들 덕분에 저절로 되고, 말하기는 묻고 또 묻느라 저절로 된다. 칭찬에 후한 이곳 사람들에게 여행이 끝날 때쯤에는 완벽한 이탈리아어를 할 것이라는 격려를 종종 받는데, 그들 말마따나 이러다 이탈리아어를 완전 잘하게 생겼다.
기차를 기다리며 숙소에 전화를 하니 호스트가 영어를 매우 잘한다. 버스를 놓쳐 늦게 도착할 것 같다고 하니, 숙소에서 살고 있으니 아무 때나 와도 된단다. 상황이 꼬이기는 해도 최악으로 치닫지는 않는 것도 신기하다.
기차 안. 검표원이 표를 검사하며 내 표를 보고 달리 말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 기차는 시라쿠자 행이 확실한가 보다 한다. 매 순간 이렇게 전전긍긍하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은 시라쿠자 역에 내려야 완전히 마음을 놓지 싶다.
바닷가로 난 기찻길을 따라 내려간다. 간간히 바다도 보이고 거대한 산업시설들도 보인다. [정유시설이었던 것 같다. 시칠리아 라구자 인근 바다에 유전이 있고, augusta 인근 해안에 정유시설이 있단다. 이탈리아가 산유국임을 처음 알았다.^^] 나는 휘발성 저장장치를 가진 것이 분명하다. 어느새 낯선 풍경에 정신이 팔려 기차 타기 전까지의 고난을 모두 잊고 마냥 신났다. 철길 가장자리에 알록달록한 열매를 다닥다닥 매달고 가로수처럼 늘어선 피끼딘디아, 석양에 빛나는 들판과 구름, 석양을 등지고 서있는 나무... 다시 바닷가다. 내륙에서 보낸 시간이 2박3일 밖에 되지 않는데 바다를 본지 한참만인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