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짜 아르메리나에서 빌라 로마나까지는 5km 남짓이고 내리막 길이란다. 버스가 있지만 두 시간 가까이 기다려야 하고, 1km 정도 걸어서 정류장을 찾아 헤맬 생각을 하니 걸어가는 게 낫다 싶다. 여행 안내서에 풍경도 좋고 걸을 만하다니, 무모한 도전은 아닐 것 같고, 방해 받지 않고 하염없이 걷는 것이 일상의 소원인데, 걷지 않을 이유가 없다.
[피아짜 아르메리나 art cafè roma]
아침 든든히 먹고 천천히 걸어갔다가 돌아 올 때 버스든 택시든 타고 오기로 마음을 먹고 숙소에서 빌라 가는 방향으로 가장 가까이에 있는 바art cafè roma를 찾아 들어갔다. 그런데 바 진열장에 단 것들 밖에 없다. 그래서 qualcosa salata(짠 것)는 없느냐고 물으니, 빠니니를 먹고 싶느냐고 되묻는다. 그렇다고 하니, 밖에 빠니니panini 가게 사장님이 있으니 가서 말을 하란다. 그렇게 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단 크루아상을 먹겠다 하려 했다. 그런데 이미 바 사장님은 동네 아저씨들과 수다 삼매경에 빠진 빠니니 사장님을 불렀다. 엉엉, 내가 그러겠다고 말하지 않았잖아요... 이미 나를 대변해 자초지종을 전했다. 빠니니 사장님이 내게 빠니니가 먹고 싶느냐고 묻더니 대답할 기회도 주지 않고 같이 가자며 앞장을 선다. 그렇게까지는 아니에요 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먹는 것을 좋아하고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있는 것으로 충분히 기쁘게 때울 수 있는, 빨리 끼니를 해결하고 목적지에 갈 생각 밖에 없는 관광객의 한끼를 이리도 존중하다니...
뜻하지 않게 빠니니 사장님과 아침 산책을 하게 됐다.^^ 어디에서 왔느냐고 물어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남한에서 왔지 한다. 남한이냐 북한이냐는 질문은 받았어도 남한에서 왔느냐는 질문은 처음이다. 북한 김정은이 다른 나라들과 사이 좋게 지내야 하는데 하며 국제 정세 걱정이다. 이 작은 도시에서 김정은을 아는 게 너무 신기하다. 그래도 몇 년 전에 비하면 너무 평화롭다고 대답하고, 어떻게 아냐고 물으니, 그것만 아는 것이 아니란다. 전 세계 정치를 다 안단다. 하하하... 그러니 다른 세계 사람이 반갑지... 옛날 이탈리아에서 몇 개월 지낼 때 외국인이랑 이야기하는 것 좋아하고 신기해 하는 호기심 많은 이탈리아 사람들을 보긴 봤었다. 이 분도 자기 말을 좀 알아듣고 더러 하기도 하는 이방인을, 그것도 북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한국 사람을 만난 것이 마냥 신이 나신 눈치였다. 그런데 난 이 아침에 빠니니 사장님과 북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원하는 아침을 먹을 수 있느냐 이다.
제법 걸었는데 밥 먹을 만한 곳이 보이지 않는다. 가게는 어디에 있냐고 물으니, 손가락으로 길 건너를 가리키는데, 바도 식당도 아니고 이탈리아 사람들이 알리멘따리alimentari라고 부르는 작은 슈퍼다. 살루미도 팔고 치즈도 팔고 갖가지 채소 저장 식품도 팔고, 공산품도 팔고 하는, 우리 식으로 하면 반찬도 파는 동네 슈퍼 같은 장소. 그래서 먹을 곳이 있냐고 물으니, 그럼 있지 하신다. 없을 것 같은데 싶어 다시 물으니, 의자는 없지만 서서 먹으면 된단다. 헐... 거짓말은 안 해도 the whole truth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스타일은 아닌가 보다. 내가 바에 앉아서 아침 먹는 것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바에서 탄수화물 풍부한 맛있는 아침을 든든히 먹으려 했는데 망한 건가 싶다.
그럼 커피랑은 먹을 수 있느냐고 하니까, 눈빛이 흔들린다. 잠시 머뭇거림의 순간이 지나고, 커피는 없단다. 역시 거짓말은 안 하신다. 망했다, 망했어. 난 편히 앉아서 책도 보고, 일기도 쓰며 밥도 먹을 수 있는 곳을 원해 라고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아저씨 기분이 나를 만나 얼마나 좋은데, 아저씨에게 커피 없다고 싫다, 돌아 가겠다라는 말을 할 수는 없다. 잠시 머뭇거리던 사장님, 드디어 묘책이 떠올랐나 보다. 다 방법이 있지, 커피를 마시고 싶으면 샌드위치를 가지고 바에 가서 커피를 사서 마시면 되잖아 하신다. 그 말을 듣자 아, 그래도 되는 건가 싶어 마음이 조금 풀린다.
[피아짜 아르메리나. 저녁 때 먹기 전 찍은 사진. 하루 종일 가방 속에서 짓눌려 있었는데도 저만하다. ^^]
가게에 도착. 햄, 치즈가 진열된 카운터 안으로 들어간 사장님은 이제 세계 정세를 걱정하던 아저씨가 아니라 식료품점 주인으로 돌아왔다. 빵은 어떤 것으로 할 것이냐, 햄은 뭐를 넣을까, 치즈는 넣을 거니 묻는다. 이탈리아 살루미(salumi; 햄 소시지 종류의 통칭)를 엄청 좋아하는데, 온갖 살루미를 내 마음대로 넣은 샌드위치를 먹겠다 싶으니까 오면서 망했다 했던 것은 다 까먹고 나도 신이 났다. 두 ‘종류’를 넣어도 되냐 물으니, 원하는 대로 다 되니 말만 하란다. 나는 ‘종류tipo’를 강조해서 말 했기에 아저씨가 당연히 내 말을 이해한 줄 알았다. 그런데 잠시 살루미를 고르는 사이 아저씨가 빵을 두 개를 잘라 놓았다. 두 ‘종류’라 분명히 말했건만 어찌 똑 같은 빵 두 개를. 엉엉… 순간 갈등했다. 상황을 바로잡을 것이냐 아니면 그냥 넘어갈 것이냐... 아저씨가 나를 만나 지금 얼마나 신이 났는데, 빵 하나를 버리게 할 수는 없다. 그래, 저녁까지 먹지 뭐, 내가 살루미 넣은 빠니니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돈도 아끼고 좋네 하며 햄과 치즈를 골랐다.
햄 고르는데 한나절, 치즈 고르는데 한나절... 먹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 결정을 못하고 꾸물거리는데 전혀 재촉의 기색이 없다. 오히려 이건 어떨까, 저건 어떨까 하며 선택을 도와줬다. 그리고 이거 넣어도 돼, 저거 넣어도 돼 하며 물어볼 때마다 come vuoi (=as you want)라는 다정하게 답을 하신다. 외국 사람이 어떤 김치를 먹을까 고민한다면 이건 어떤 맛이고 저건 어떤 맛이고 설명해주려 하지 않을까? 당연한데 왜 이리 고맙지?^^
고른 것을 쓱쓱 잘라 넣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내게 등을 보인 채로 한참 뭔가를 매우 신중한 태도로 샌드위치 위에 뿌렸다. 샌드위치에 이렇게 정성을 들일 일인가 싶다. 그러고 보통 샌드위치를 싸주는 종이에 싸고 있다. 그 모습에 난 또 노파심이 생겼다. 가방에 넣고 다녀야 하는데 종이에만 싸주나 싶었던 것이다. 가방에 넣어야 하니 비닐 봉지에 넣어 달라 잔소리를 덧붙였다. 그러니 무슨 걱정이 그리 많느냐는 표정으로 걱정 말라며 나를 진정시키고 계산하는 카운터로 가져 간다. 햄도 두 종류로 넉넉히 넣고, 치즈도 생 모짜렐라로 넉넉히 넣었는데 너무 싸다. 개당 3유로. 그리고 비닐 봉지에도 넣어 주었다. 크기도 어찌나 큰지 가방이 두둑해졌다. 샌드위치 집을 나오는데 괜히 피식피식 웃음이 나고 기분이 좋다.
생각해보면 나는 얼굴만 친절하고 밝았고, 마음 속은 계속 의심하며 안달복달했었다. 사장님은 내 조바심에 전혀 휘둘리지 않으며 본인의 속도로 내가 원하는 걸 해줬다. 심심하지만 뭔가 refreshing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백색소음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바bar에 가서 먹으라 했으니 샌드위치를 들고 다시 바로 가기는 가는데 마음이 편치 않았다. 다른 곳에서 산 음식을 먹는, 상식에 어긋난 짓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 바 사장님 탓에 벌어진 일이기는 해도 먹어도 되겠느냐고 먼저 허락을 구해야겠지 하며 불편한 마음으로 바에 들어섰는데, 사장님이 먼저 샌드위치 사왔느냐고 물으며 반긴다. 그럼!!!^^ 이 동네 뭔가 심심하게 재미있고 훈훈하다. [아무튼 그날 하루 종일 마시는 것 빼고 먹은 것이라고는 그 샌드위치 두 개였다. 그래도 다 못 먹고 결국 조금은 버렸다. 아니, 생각해보니 로베르또의 할아버지 친구가 준 무화과 4개가 더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