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짜 아르메리나]
사람들이 피아짜 아르메리나에 가는 이유는 하나라고 했다. 마을 외곽 카잘레casale라는 곳에 있는 로마 귀족의 빌라 때문이라고. [카잘레는 농가, 시골마을을 뜻하는 일반명사. 정식 지명은 아닌데 그 지역을 그렇게 부른단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villa romana del casale)으로 지정됐을 만큼 로마시대 모자이크가 잘 보존되어 있는 빌라라고. 그렇다니 그런가 보다 했었다. 교통편만 좋았다면 당일치기를 하거나 카잘레의 빌라만 보고 다음 목적지로 이동하는 계획을 세웠을 수도 있다.
그런데 만일 그랬다면 내 마음 속 시칠리아가 지금의 시칠리아와 조금은 다르지 않았을까... 이제는 피아짜 아르메리나가 시칠리아 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마을이 되었다. 시칠리아 여기저기에 마음을 많이도 흘리고 다녔지만 이곳에는 특히 큰 조각을 떨어뜨리고 온 것 같다. 잃어버린 조각을 찾으러 갈 날이 있을까?
빠니니 추억을 만들어 준 바 사장님과 식료품점 사장님.
어떻게 그렇게 말이 잘 통했는지 아직도 신기한 로베르또.
떨리는 손으로 무화과를 까주던 로베르또의 할아버지 친구.
도도했지만 보는 사람마다 붙잡고 자식 자랑하듯 나를 자랑했던 파올라.
하루만 머무는 것이, 그것도 잠만 자고 아침 일찍 떠나야 하는 게 너무 아쉬웠던 숙소.
이방인을 따뜻하게 환대하고 환송해준 숙소 가족들...
현재 피아짜 아르메리나는 중세 노르만 왕조 때 시칠리아로 이주한 롬바르드족에 의해 형성된 모습이라고 한다. 롬바르드족은 노르만 세력이 시칠리아를 두고 이슬람세력과 전쟁을 벌이던 시절 용병으로 시칠리아에 들어왔고, 이후 이슬람세력을 몰아내고 시칠리아 왕국을 세운 노르만 왕들은 기독교 세력을 정착시키려는 목적으로 롬바르디아족을 이주시켜서, 롬바르디아 족은 시칠리아 중부와 동쪽에 자리잡게 되었단다. [엔나도 롬바르디아족 정착지에 포함된다.]
롬바르디아족이 이 지역에서 처음 정착한 곳은 로마 시대 빌라가 발견된 카잘레 지역이였는데, 윌리엄 1세 시절 역모에 가담했다 실패해서 마을이 초토화 되었단다. 이후 윌리엄 1세의 아들 윌리엄 2세가 왕위에 오르자 도시 재건을 간청했으나, 윌리엄 2세는 아버지의 칙령을 거역할 수 없다며 마을에서 3km 떨어진 곳에 도시 건설을 허락했고, 그래서 형성된 도시가 현재 피아짜 아르메리나라고 한다. 지금도 피아짜 아르메리나를 포함한 이 일대에 시칠리아 롬바르드족 커뮤니티라는 지역색이 남아 있고, 특유의 사투리gallo-italico di sicilia가 통용된단다.
프랑스 앙주 가문 출신 왕 샤를 1세charles I of anjou를 몰아냈던 시칠리아 만종 사건(i vespri sicilian, 1282년) 이후 아라곤의 페데리코 2세를 시칠리아의 독자적인 왕으로 추대하는 임시 의회가 열렸던 곳이 바로 이곳이라 한다. [정식으로는 카타니아의 우르시노 성castello ursino에서 추대되었고 대관식은 팔레르모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다.] 샤를 1세의 손자인 앙주 가문 로베르robert of anjou가 시칠리아를 되찾고 왕위에 오르려 침공했으나, 이곳 사람들이 강력히 저항했다고 한다. 이를 고맙게 여긴 아라곤의 페데리코 2세는 도시의 충성심에 보답하기 위해 '가장 신의 있는 도시'라는 칭호와 함께 엄청난 자치적 특권을 주었는데, 이 특권들이 기록된 필사본이 예수회 수도원을 개조한 시립 도서관biblioteca comunale에 있다고 한다.
[P.S. 아라곤의 페데리코 2세의 세대 수는 논란이 많다. 누구는 2세인데 3세라 주장했다, 누구는 3세인데 2세라 주장했다 등등... 이유는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페데리코2세와 자신을 구분하기 위해, 3세라 했다,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위대한 페데리코 2세를 받들어 2세라고 했다,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위대한 페데리코 2세는 신성로마제국의 칭호이고, 시칠리아 왕국으로는 페데리코 1세이니 자신은 그 뒤를 잇는 2세라고 주장했다 등등... ]
무솔리니가 정권을 잡고 지역의 수도를 파시스트 도시 엔나enna로 바꾸는 과정에서 피아짜 아르메리나는 스페인 통치 시절 계속 유지했던 지역의 수도 지위를 빼앗기고 엔나 주provincia di enna의 일부로 들어가게 되었단다. [그때 박혔던 미운털(?) 때문인지 기차역도 없고 다른 교통편도 별로 없어 약간 오지같은 느낌이 있었다.]
[카잘레의 빌라 로마나villa romana del casale. 이 모습으로는 안에 무엇이 있을지 전혀 짐작할 수 없다]
카잘레의 로마 시대 빌라는 피아짜 아르메리나에서 남서쪽 3km 떨어진 곳에 있다. 물이 풍부하고 비옥한 지역이였고, 시칠리아 고대부족 시카니sicani가 정착해서 살았단다. 로마시대에는 이곳에 라티푼디움latifundium(대규모 농장)이 있었고, 빌라는 농장 소유주 로마 귀족의 저택이었단다. [라티푼디움은 로마가 기원전 3세기 1차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하여 시칠리아를 카르타고로부터 빼앗은 후, 그들이 곡창지대에서 농장을 운영하는 방식을 답습해 만든 토지 운영제도로, 제도를 의미하기도 하고 노예들의 무상 노동으로 운영되는 거대한 농장을 뜻하기도 한다. 시칠리아에서 시작되어 로마제국으로 퍼졌고, 중세에 장원제도로 발전하게 되었다. 엔나에서 발발한 1차 노예전쟁이 바로 라티푼디움에서 착취당한 노예들의 반란에서 시작됐다.]
이후 역사적 부침과 자연 재해로 빌라는 땅속에 묻히게 되었고, 작은 농촌마을로 남게 되었단다. 그러다 19세기 초 이 지역에 대한 고고학적 관심이 높아져 몇 번 발굴을 시도했고, 1950년대 본격적으로 발굴이 시작되어 1997년 villa romana del casale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