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7/2020
시칠리아 여행: 여행기를 마치며
오랜 시간을 들여 여행을 복기했다. 모든 순간을 다 담은 것도 아닌데 한 달 여행을 복기하는데 1년이 걸렸다. 게으름도 있었고, 샛길로 빠지기도 했고, 싫증이 나기도 했지만, 여행의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정리하다 보니, 그곳에서 하루의 밀도가 평소 한 달의 밀도와 다를 바 없었고, 그렇다면 그 긴 시간이 충분히 fair 하고 충분히 justify 되는 것 같다.
물리적으로는 같은 시간이라도 시간의 밀도에 따라 길이가 얼마나 다르게 느껴지는지 절실히 느꼈다. 일상은 지루한데, 시간은 쏜살같이 흐르는 역설을 비로소 이해했다고나 할까...
재미로 시작했는데, 마무리하기까지는 많지 않은 인내심을 싹싹 끌어모아야 했다. 역병의 창궐로 갇힌 덕을 조금 보기도 했다. 아무튼... 이제 행복했던 순간을 손쉽게 떠올릴 수 있는 기록이 어딘가에 있어 좋다.
여행 도중 문득, 갈증이 해소되기는커녕 그리움과 더불어 쌓인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지역 전문가도 아니고 관련된 역사나 예술을 연구하는 사람도 아니고... 내 마음이 과한 것 같고 그런 느낌의 정체는 지나간 것에 대한 미련이나 후회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며, 뒤돌아 보지 않으리라, 앞만 보고 가는 사람이 되리라 하며 다시 시칠리아에 오지 않겠다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여행을 복기하며 생각이 달라졌다. 내가 나여도 된다는 것, 철학을 세우고 중심을 지키려 노력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 내 삶의 중심에 나를 둬야 한다는 것... 모두 알지만 어느 순간 중심을 잃고 풍선 인형처럼 흐느적거리는 나를 응원하고 격려해 조금은 더 단단한 인간으로 만들어 돌려보내준 곳. 하루 평균 13km가까이 16,000보를 걷게 하고, 하루를 한 달처럼 살게 하고, 심지어 끼니 챙기기를 미루게 했던 곳...
나는 조금 더 분명하고 단단해졌지만 동시에 좀더 가볍고 자유로워졌다.
시칠리아 전문가도 아니고 학자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곳에 다시 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 건조한 삶에 그리운 대상이 생긴 것도 감사할 일이었다.
어두운 시간이 지나면, 상황이 허락한다면, 역병의 트라우마를 지닌 그곳이 나를 어떤 얼굴로 맞을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다시 그곳에 가고 싶다.
그날이 너무 늦지 않게 오길...
그리고 그때까지 모두 최선을 다해 안녕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