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1/2020
시칠리아 여행: 31: 팔레르모: 시칠리아 마지막 밤
마씨모 극장 앞 베르디 광장에 줄줄이 서있는 택시가 오늘따라 눈에 띈다. 공항까지 택시비를 물으니 45유로라고 한다. 극도로 짐을 늘리지 않으려 애썼지만 책도 사고 기념품도 사고 하다보니 짐이 좀 늘어 꾀를 부려볼까 했는데... 그냥 일찍 일어나 공항버스 타고 가야겠다.
고생을 사서 하는 여행자 정신이 날아가려 하고 있다. 이제 하루만 잘 붙잡고 있으면 된다. ^^
한 달 하루를 기약한 여행의 마지막 밤. 짐을 쌌다. 온갖 소회가 솟아날 줄 알았는데, 계속 마지막이라 의미는 부여해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덤덤하다. 이제 집으로 간다는 게 너무 좋아서일까? 짐을 쌌다 풀었다 하지 않아도 되고, 화장실에 들어가면 필요한 모든 것이 다 제자리에 있고, 아무리 깨끗해 보여도 왠지 찜찜한 침대가 아닌 내 침대에서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고, 먹고 싶은 것 알맞게 적당히 먹을 수 있고... 곧 그 모든 것을 하게 된다는 게 너무 좋은 건가...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날도 이렇게 덤덤하려나 싶다. 모든 드라마는 그 순간에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며 극적으로 묘사하려 애쓰지만, 그래봐야 작가의 상상일 뿐이지 경험은 아니잖아...
몬레알레 성당... 시칠리아에서 하나만 볼 수 있다면 당연히 그곳을 봐야 하고, 한 번 더 보길 잘했다 생각하는데, 마음은 그곳을 두 번이나 가는 것이 마냥 잘 한 일이라고 흔쾌히 동의해주지는 않는다. 못 보고 가는 게 얼마나 많은데... 팔라쪼 아드리아노에 못 간 것이 못내 아쉬운 듯... 사실 몬레알레에 다시 가고 싶기도 했고 다시 가기 싫기도 했었다. 생각할수록 그곳이 너무 귀하게 느껴져서 다시 가고 싶었고, 지난 번에 멀리 그것을 보겠다고 온 사람들을 존중하지 않던 태도가 불쾌해서 다시 가고 싶지 않았다.
'그들이 성당의 주인도 아니고 생각이 짧은 놈들에 불과한데, 무시하면 될 것을 왜 마음 상하고 피해? 네게 아름다운 것을, 네 순간을 즐기면 그만이지...'
살다 보면 더러워 피하고 싶은 것들, 상대에게 상처 좀 입혀보겠다고 덤비는 것들, 많다. 무시할 수 있으면 무시하고, 그럴 수 없다면 맞서고, 그러다 오물이 튀면 닦고, 상처가 나면 치료하고... 그렇게 사는 거지 뭐... 더러움 하나 묻지 않고 상처 하나 없는 고운 인생이 자랑스러울 수는 없는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은 그들이 해야 하는 것을 하며 그들의 인생을 살고 있을 것이다. 나는 내가 해야 하는 것을 하며 내 인생을 살면 된다. 그런 의미에서 피하고 싶은 마음을 이기고 그곳에 가길 잘했고, 이것이 여행자에게 황금 같은 하루의 대가로 얻은 지혜, 또는 언제나 너그러운 여행이 질문하지 않아도 주는 답이지 싶다.
적어도 마음대로 마음껏 네 인생을 살라는 것으로 느껴졌던 이 섬의 한결 같은 격려는 잊지 않기로 한다.
모기 한 마리가 방안을 휘저으며 날아 다닌다. 들어오자마자 한 마리를 잡았는데 또 한 마리가 있었나 보다. 오늘은 호스트도 없어 모기향 달랄 사람도 없는데... 가지고 와서 잘 뿌리고 다니지 않아 물릴 것 다 물리고 아직도 많이 남은 모기 기피제나 침대 주위에 잔뜩 뿌리고 자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