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공항에 내려 탑승 게이트를 찾아가며 확인한 전광판에 내 항공편이 18시 몇 분으로 연착되었고 탑승 게이트는 16시 20분에 나올 것이라 하는 것 같은데, 내가 보고 있는 게 맞나 싶다. 무려 다섯 시간 연착? 일어날 확률이 낮은 온갖 사건이 내게 일어날 리 없다고 까지는 생각하지 않아도, 설마 내게 일어나겠어 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오늘은 만사가 내 태만한 사고방식대로 돌아가지 않으려나 보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라더니...
보이는 것은 맨 면세점, 확인할 곳이 보이지 않는다. 여기저기 배회하다 보니 알리딸리아 카운터가 보이고, 카운터 앞에는 역시 긴 줄이 있다. 무턱대고 서기에는 줄이 너무 길다. 주변에 유니폼 입은 직원 둘이 서서 수다를 떨고 있어, 일단 그들에게 비행기 지연을 확인하려는데 어디서 물어봐야 하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서울 가느냐고 묻는다. 그렇다 하니, 연착이 맞는단다. 4시 20분에 게이트 알려준다는 것도 맞느냐니, 맞는단다. 보딩 패스는 받았냐고 묻는다. 그제서야 보딩 패스가 왠지 발권이 안 된다며 환승 카운터에서 받으라 했던 것이 생각났다. 연착도 연착이고 탑승구도 정해지지 않았으니 발권이 안됐던 것이었다. 보딩 패스는 여기서 줄 서서 받으면 되고, 위층 식당가에 가서 보딩 패스를 보여주고 스낵을 먹을 수 있다고 알려준다. 뭐, 나쁘지 않아. 면세점 구경도 하고, 팔레르모 공항에서 산 요리잡지도 보고... 다섯 시간 쯤이야... 마음은 이미 각오를 마쳤다.
보딩 패스를 받으려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줄 선 사람들이 뭐 때문인지 성이 잔뜩 났다. 다 미국 애들. 일행은 아닌데 모두 대학생쯤으로 보인다. 순서를 기다리며 서있는데, 뒤에 서있던 미국 여자애가 빈 카운터로 가라고 재촉질이다. 별 생각 없이 시키는 대로 가니, 카운터 직원은 인상을 쓰며 기다리라고 손사래를 친다. 다시 뒤로 왔는데 그 계집애는 사과 한마디가 없다. 너 또한 참 본데 없이 자란 미국인답다 하다 누구를 탓하랴, 가라고 간 내 탓이지 싶다. 그 여자애는 이래저래 분이 안 풀리는지 뒤를 돌더니 뒤에 줄줄이 서있는 다른 미국 애들과 이탈리아의 일 처리 방식을 두고 무례하기 짝이 없이 지껄여 댄다. 또 너희들이나 잘해, 이것들아 라고 말해주고 싶다. 미국 떠난 후 그곳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바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눈에는 이탈리아나 미국이나 도긴개긴이다. 그 애들도 버스 안에서 본 미국 사람들과 결이 같다. 자국이 first가 아닌 나라가 있을까? 그들이 말하는 first는 사실 only다. first라 쓰고 only라 읽는다던가... 그러니 그렇게 주구장창 시도 때도 없이 지껄여대는 것이다. 내 옆 창구가 비어 그 애가 그곳으로 왔다. 방금 전 그 험악한 표정과 입은 어디 갔을까? 너무나도 상냥하고 예의 바른 태도다. 심지어 웃는다. 창구 직원이 잘 생긴 이탈리아 청년이라서 그런 것일까? 무섭다, 저런 애들. 그들 나라의 대표는 카멜레온 같은 변신이 가능한 능력자인 그 애를 미국의 딸답다며 자랑스러워 할 것 같다.
보딩 패스를 받아 공짜 스낵을 준다는 곳으로 갔다. food court 같은 곳이다. 주문하는 카운터가 여럿이고 peak time이라 다들 정신이 없다. 어디에서 무엇을 먹을 수 있는지 아무런 안내가 없다. 여기저기 물으니 입구 카운터에서 샌드위치 한 개와 음료수 하나를 주문할 수 있다고 한다. 줄이 없다. 대충 서있다 눈치껏 주문하는 분위기다. 내 차례다 싶어 주문을 하려 했더니, 카운터에서 주문을 받던 녀석이 갑자기 카운터 뒤로 줄을 서란다. 뭔지 신호가 오지만 뭐... 기다려서 주문하며 음료수는 뭐가 있냐고 물으니, 어딘지 특정할 수 없는 방향을 가리키며 이탈리아어로 뭐라 지껄인다. 어디를 말하는 것이냐 다시 물으니, 악 쓰듯 뭐라 하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다. 내게 마음껏 성질을 부린다. 거지 취급을 받은 기분이다.
나는 부정이나 불의에 예민하고 시시비비를 가려야 속이 편하다. 이해할 수 없는 부당함은 내 머리 속에 오래 기억된다. 갈등의 표현을 문제를 일으키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는 분위기에서 자라서 부당함에 제대로 반응하지 않도록 설정이 되어있나 싶을 때가 있다. 사건이 벌어진 자리에서 잘 대응하지 못하고 뒤에 가서 억울하다. 아까도 그 자리에서 내게 소리를 지르는 이유를 묻고 사과를 받을 수는 있었는데 싶다. 사소했어도 인종차별이었고, 그렇다면 묵과하면 안 되는 일이었다.
기분은 나쁜데 샌드위치는 왜 맛있는 거? 반쯤 먹으니 속 없이 맨 빵이다. 그만 먹고 나왔다. 배는 고프지 않는데 미국 것들과 이탈리아 놈에게 받은 스트레스 때문인지 뭔가 따뜻하고 짭짤한 것을 먹고 싶다. 그런 음식을 찾아 온 식당의 메뉴 판을 다 읽고 다녀도 맘에 드는 것이 없다. 계속 가다 보니 일본식 식당이 나온다. 일식 라면은 싫고 불고기 덮밥 같은 메뉴가 있다. 따뜻하고 짭짤하고 밥이니까 먹어준다. 이 정도 맛으로 장사가 된다면 동네 분식집 수준의 한식당으로도 공항 손님을 싹 끌어 모을 것 같다.
시간이 지나며 식당가에서 있었던 일을 언짢은 상태로 묵과하는 건 한 달 동안의 여행에 대한 배신처럼 느껴진다. 그 놈에게 자신의 행동에 대한 결과가 있다는 것쯤은 알려주고, 알리딸리아에게도 서비스를 하려면 제대로 하라고 말 한마디는 해야 할 것 같다.
알리탈리아로 가며 증거로 녀석의 사진을 찍고 가서 카운터에서 메니저를 찾았더니, 어떤 남자가 자신에게 말하면 된다고 나온다.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려 했더니,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도 않고 사진을 찍으면 안 된다고 난리난리다. 대중에 공개라도 한다면 찍힌 사람이 그것을 빌미로 나를 공격할 수 있다고, 이탈리아 에서는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온갖 호들갑이다. 도대체 얘들은 왜 말을 한 번만 못할까? 이탈리아 사람들이 대체로 제 말 하기에 바빠 남의 말을 잘 듣지 않으니 생긴 현상일 것 같기는 하다. 내가 언제 인터넷에 올린다고 했니? 인권에 대한 의식은 네게만 있겠니? 왜 그리고 언제부터 너는 내게 생길 문제를 걱정하는 사람이 된 거니? 웃긴 일이다. 짜증...
아무튼 어떻게 그 입을 막고 상황을 전했다. 내가 공짜 밥을 달란 게 아니고, 너희가 비행기를 지연시켜 내게 스낵을 제공한 상황이다. 그런데 그곳에서 나를 거지 취급했다 까지 말했다. 이 상황에 대해 너희도 책임이 있고 뭔가를 해야 하는 것 아니니? 라고 마저 말하려는데, 이 말은 안 들어도 알겠는지, 그렇더라도 자기가 그들의 보스가 아니라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하며 제 입장 방어에 급급하고 같은 말을 무한반복하며 내 입을 막는다. 이들이 똑같은 말을 얼마나 반복할 수 있는 사람인지 익히 알아 놀랍지는 않다. 그렇지만 나도 할 말이 있는데 실컷 하라고 내버려두고 싶지 않다. 평생 누구에게도 해본 기억이 없는 말을 했다. let me talk!!! 와, 그 말이 먹힌다. 제동을 걸면 걸리는 입이었다.^^
다른 레스토랑이 많은데 그리 가라고 한 것을 보면 너희와 contract가 있는 것 아니냐 했더니, contract는 없고 little agreement가 있단다. 참나... 그렇다고 가서 그 직원을 해고하라고 하거나 하는 일은 할 수 없단다. 누가 해고하라니? 경고를 하고 교육을 시키라고, 자식아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렇게까지는 못하고, 나는 그들이 너희 손님을 존중하지 않고 어떻게 대하는지 알려주고 싶었고, 이런 일이 반복되면 '너'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겠지만, '알리딸리아'는 식당을 바꾸든지 뭔가를 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자 네 권한이 미미해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거라는 뜻으로 들리길 바랐던 말이 제대로 전달됐나보다. 자존심이 상했는지, 지금은 자기가 알리딸리아를 대표하고 있으니 '알리딸리아'가 아니라 '너'라고 해도 된단다.^^ 이야기가 무리하지 않게 흘러간다 싶으니 다시 폼을 잡고 싶은지, 이제야 자신이 대표란다. 너희들은 너희들 때문에 내 날을 망친 것을 알아야 한다고 했더니, 그제야 자신들이 취할 태도를 이해한 듯하다. 자기들 때문에 비행기가 지연되어 내 시간도 소비되고 불쾌한 일을 겪게 했다고 미안하다고... 그 말을 또 다섯 번은 이야기한다. 으악~ 한 번만 하면 된다고, 자식아 라고 말하고 싶다. 오늘 일을 알리딸리아 홈페이지에 자세히 올리란다. 알리딸리아가 적절한 조치를 취하고 딜레이에 대한 보상을 할 것이란다. 네가 지금 하면 될 일을 왜 나보고 또 하라고 해? 나도 너만큼 귀찮은 것 싫어해 라고 말하고 싶다. 알리딸리아는 이만하면 됐다.
이번엔 식당으로 갔다. 펜과 메모지를 꺼내 들고 그 놈에게 이름을 적으라 했다. 이유를 묻는다. 알리탈리아에 신고할 거라 했다. 그랬더니 자신은 아무런 문제가 없단다. 뭐래, 이곳 화법이야 뭐야... 내가 문제가 있다고 했더니, 험악한 표정을 짓는다. 뭘 어쩌겠어 싶어 버티니 할 테면 해보라며 first name을 적는다. 성까지 대라 하니 적지 않는다. 다른 직원이 무슨 일이냐며 다가온다. 저 사람 성이 뭐냐 물었다. 그런데 저희들도 잘 모르는지 서로 뭐냐고 묻는다. 늘 이름만 부르니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분위기로 보아하니 같이 일한다고 그 놈과 한통속은 아니다. 그 놈은 태연한 척 큰소리로 떠들며 낄낄거리는데, 괜한 허세가 느껴진다. 천성이 나쁜 놈이다. 천성을 좋게 바꿀 수는 없지만 조건 반사 식의 training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좋은 행동을 하면 먹이를 주고, 나쁜 행동을 하면 전기 자극을 주는 식으로... 버티고 있으니 또 다른 사람이 와서 알고 보면 착한 사람이라며 성을 적어준다. 그러고 커피를 마시겠냐고 묻는다. 뭔가 보상하려는 마음은 고맙지만 큰 위로가 되지는 않는다. 아무튼... 이름을 받아들고 식당을 나오는데 등 뒤로 왜 알려줬냐는 소리가 들린다. 물론 온라인으로 신고할 생각도 없고 그가 해고되길 바라지도 않는다. 행동에는 결과가 따른다는 것, 그리고 사회를 더럽히지 않는 일원이 되기 위한 행동을 배울 수 있는 의미 있는 전기 자극이 되었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