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1/2020

시칠리아 여행: 31: 팔레르모: 마지막 산책 & 다시 비가 Biga





[팔레르모.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거리. 아래 그림 속 풍경. 100년도 더 된 그림이지만 그림 속 풍경과 앵글만 다를 뿐 별로 변한 게 없다. 그림 속 플라타나스가 이렇게 굵어진 것이 감동]

[팔레르모. 산타 안나 근대 미술관에 있는 미켈레 카티michele catti의 포르타 누오바porta nuova라는 작품]




왕실 정원을 나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거리를 걸었다. 마음은 눈에 띄는 모든 것에 안녕을 고한다. 집에 갈 준비가 됐다고 한 점 아쉽지 않은 건 아니다. 남은 시간의 길이를 늘일 수도 없고 늘이고 싶은 마음도 없으나 밀도는 높이고 싶다. 그라니타라도 하나 들고 걷는 게 그냥 걷는 것보다는 왠지 더 '찐'한 느낌이랄까... 

딱히 먹고 싶지 않은 그라니타를 사러 가게cappadonia gelati로 들어갔다. 모든 아이스크림이 뚜껑 덮인 스텐레스 통에 들어 있는 것이 뭔가 전문적으로 보인다. 혹시 초코 그라니타가 있냐고 물으니, 역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없단다. 시칠리아 어딘가에서 초코 그라니타를 판다는 말조차 들어본 적 없다고 말하는 표정... 안 먹어봐서 모르는 거지, 초코 그라니타가 얼마나 맛있는데... 그럼 레몬 그라니타로 달라고 하고 기다리는데 아디오피쪼addiopizzo 마크가 보인다. 어감을 살려 해석한다면 '안녕, 삥...' 정도가 되지 않을까... 마피아의 사업에 동조하지 않겠다는 뜻을 표현하는 표시라고 들었다. 

조금 더 걸으니 작은 가게 입구에 걸린 no mafia memorial이라는 무지개 빛 작은 현수막이 유난히 더 눈에 들어온다. 오가며 여러 번 보았었다. 마피아의 만행을 기억하자는 기념관 같은 곳인데, 망설이다 끝내 들어가지 않았다. 왠지 그곳에 들어가는 일이 남의 아픔을 호기심으로 기웃거리는 느낌이라 내키지 않았었다. 마피아의 해악을 알리는 것이 목적일 테니, 충분히 이해하고 있고 그들의 방식을 지지하지 않는 것으로 됐다 했었는데, 그래도 들어가서 기부라도 좀 할 걸 그랬나 싶다.

마지막이라 그런지 무심코 지나다니던 모든 것에 시선이 간다. 길거리 화분, 기념품으로 모자이크를 만들 기세인 기념품 가게, 수북하게 쌓여있는 카놀라, 끝내 먹어보지 않은 내장 넣은 샌드위치 파니 카 메우사pani câ meusa 가게... 사람들이 몰려나올 시간이라 더 활기 있는 카를로스 5세carlos v의 동상이 있는 볼로니 광장piazza bologni. 계단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 버스킹 하는 사람들, 삼삼오오 무리 지어 서성이는 사람들.


[팔레르모. 신박한 기념품 배열. 조상 중에 모자이크 장인이 있지 않을까...]

[팔레르모. 속이 채워지길 기다리는 카놀리]

[팔레르모. 볼로니 광장piazza bologni와 카를로스carlos 5세 동상]


[팔레르모. 파니 카 메우사Pani câ meusa 가게]

[팔레르모: 킨토 칸토quinto canto라고 불리는 산 쥬세뻬 교회의 입구]


꽈뜨로 깐띠. 마지막으로 보려던 산 프란체스코 교회로 가려면 동쪽으로 가야하고 숙소로 돌아가려면 북쪽으로 가야 한다. 6시가 다 됐고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산 프란체스코 교회를 봐도 어차피 보고 싶은 것 태산처럼 남기고 떠나야 한다. 마침표를 찍어야 하는 순간이 있고, 순하게 현실을 받아들이는 게 현명한 때가 있는 것. 산 프란체스코 교회는 인연이 없는 걸로...




다시 비가Biga


마지막 만찬은 점심에 했으니 숙소 가는 길에 있는, 매일 먹어도 맛있을 것 같은 비가에서 빵 한쪽 먹고 숙소로 돌아가자 마음을 먹고 마케다 거리를 따라 걸었다. 그런데 비가, 비가... 하며 자꾸 가게 이름을 되뇌게 된다. 언젠가 어디서 들어본 말 같다. 그리고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빵 만들 때 나오는 용어였던 것 같다. 보통 빵은 두 번 발효를 하는데, 전통적인 방식으로 세 번 발효하는 빵이 있고, 그 빵의 1차 발효된 반죽을 비가biga라고 불렀던 것 같다. 그 단어를 마지막으로 떠올렸던 것이 15년은 됐을 텐데 기억이 나는 게 신기하다. 모든 것이 잊혀지는 것 같지만 진짜 잊혀지는 것도 없구나 싶다. 가게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면 반죽에 대해 매우 진지하다는 뜻이다. 어쩐지... 빵이 그렇게 맛있었던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빨리 가서 먹고 싶어 발걸음이 빨라진다.




착한 사람은 어떻게든 티가 난다. 이곳 청년도 그런 사람이다. 또 왔냐고 반갑게 맞는다. 오늘은 얇게 썬 감자와 치즈를 얹은 것을 시키고 추천을 받아 시칠리아 맥주도 시켰다. 오늘도 역시 빵이 맛있다. 토핑은 그냥 순하고 밋밋하다. 시칠리아 음식에서 가장 좋은 점을 꼽으라면 간이 세지 않다는 것을 꼽고 싶다. 청년은 조금 스스럼이 없어졌는지 맛이 어떠냐고, 맥주는 마음에 드냐고 묻는다. 들어올 때부터 앉아있던 똘망똘망해보이는 아가씨와도 틈틈이 이야기를 나눈다. 친구인가 보다. 나는 아직도 주변에 남녀 사이에 친구가 어디 있냐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게 신기하고, 남녀가 친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게 이상하다. 이들도 친해보이지만 연인은 아니고 그저 좋은 친구로 보인다. 착한 청년이 내가 선택한 감자가 제일 팔리지 않는다고 이유를 묻자, 친구가 단호하게 색깔이라고 말한다. 맞다, 색이 너무 밋밋하다. 그런데 나는 그래서 먹어보고 싶었다.^^ 맛도 그렇게 순하다. 나는 이런 맛을 좋아한다. 하지만 대중적이지는 않겠다 싶다. 맛은 그대로 두고 향을 좀 더하면 좋을 것 같다. 끼어들어서 펜넬 씨앗을 좀 뿌리면 어떻겠냐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계산하는데 마침 손님이 없어 한가하다. 그래서 청년에게 비가가 빵의 엄마라고 할 수 있는 반죽을 말하는 것이냐고 물으니, 눈이 동그래지며 어떻게 알았냐고, 위키피디아를 찾아 봤냐고 되묻는다. 오래 전에 알던 단어인데 갑자기 생각이 났다고 했더니, 양손 엄지 손가락을 치켜 올리며 좋아한다. 똘망똘망한 여자 사람 친구에게 내가 어제도 왔었고 매일 먹을 수도 있다고 했다는 말을 자랑처럼 전하고, 내게는 또 오란다. 내일 집으로 간다고, 시칠리아에서 먹는 마지막 저녁이었다고 하니, 만나게 돼서 정말 좋았다고, 특별한 손님이라고 말해준다. 내 마음 한 조각이 성냥개피 한 개의 힘만큼이라도 청년의 삶과 꿈을 지지하는 힘이 됐으면 좋을 것 같다. 청년의 순박한 마음이 내게도 전해져 기분이 좋다.

오늘 비가처럼 가끔 말 그대로 뭐든 열게 하는 key word가 있다. 언젠가 뽀따뚜라potatura라는 단어는 진짜 대문을 열게 했었다. 와인 배우다가 알게 된 단어였는데 가지치기라는 뜻이다. 리구리아 친퀘테레를 잇는 트레일을 걸어보겠다고 친구랑 걷는데, 가파른 산기슭에 다랭이논처럼 일궈놓은 포도밭에서 아저씨가 혼자 가지치기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뽀따뚜라하세요 라고 물으니, 아저씨 눈이 휘둥그레졌었다. 외국인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니다 싶었을 듯...^^ 그래서 어디서 왔냐 부터 시작해서 산기슭에 서서 한참 이야기를 하게 됐고, 결국에는 여름에 만들어둔 freddo, freddo, freddo한 페스토가 있다며 집으로 저녁 먹으러 가자고 초대까지 했었다. 차갑다는 뜻의 freddo를 세 번이나 말했으니 얼려놨다는 뜻이었을 거고, 리구리아 지방이 바질 페스토로 만드는 파스타가 유명하다. 물론 마음만 받고 초대에 응하지는 않았지만, 단어 하나가 낯선 사람에게 대문을 열게 했으니 말 그대로 제대로 key word였던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