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2/2026

Camino 2024: 경로에 대해...


[루르드. 뒤로 Basilica of Lourdes가 보인다]


두 번째 산티아고 순례는 루르드Lourdes에서 시작하기로...

2008년 첫 순례길, 나폴레옹 루트로 피레네 산맥을 넘던 날... 

남은 힘이 1도 없는 것 같은데 다리는 움직이고 있었다. 관성인지 생존본능인지... 지금껏 모르던 어떤 힘이 내 몸에 작용하고 있는 듯... 다리가 저절로 움직여. ㅋㅋ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어? 죽을 것 같고, 신기하고, 웃겼다. 그 모든 게 자업자득인 이 상황이 어찌나 어이가 없던지 히죽거리며 휘청휘청 걷고 있었는데, 어딘가에서 동포 순례자 2명이 나타났다. 그런데 딱 봐도 맛이 갔다 싶었는지 루르드에서 떠온 성수라며 물병을 내밀었다. 어... 그 루르드요? 루르드를 들러 생장으로 왔단다. 기적의 장소라고 수백 번 들어는 봤지만 관심도 인연도 없던 곳. 아마도 그 순간에 두 번째 순례의 출발지가 결정됐던 것이 아니었을까… [다들 알겠지만, 루르드는 프랑스 남서쪽 피레네 산자락의 작은 마을인데, 성모가 나타나서 알려준 기적의 샘물로 연간 수백 만이 방문하는 세계적 가톨릭 성지가 되었다.]


[솜포르트 고개에서 본 프랑스쪽 풍경]


그러면 솜포르트 고개Col du Somport는 왜

또 2008년 첫 순례길... 팜플로나 출신 청년을 만났었다. 대가족 안에서 반듯하게 자란 듯한 태도가 보였다. 위아래 안 가리고 잘 어울렸고, 스페인에도 유교문화가 있나 싶게 어르신들에게 다정하고 깍듯했고, 외국 순례자들을 손님처럼 챙겼다. 만날 때마다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았고, 산티아고에 도착해서 이 길 위에 있어줘서 고마웠다고 쓴 카드를 전하니, 몇 걸음 가다 다시 되돌아와 꽉 안아주었던그 청년이 솜포르트라는 곳에서부터 걸었다고 했었다. 다음 순례에는 나폴레옹 루트가 아닌 솜포르트 고개로 피레네 산맥을 넘을 거라는 것도 그때 결정되지 않았을까… ^^




인생의 많은 일이 그렇게 사소한 계기로 결정이 된다. 우연히 뭔가에 꽂히고, 실현할 방법을 찾게 되고, 방법이 있으면 하고, 없으면 할 수 없는 거고


스포츠나 레저쯤으로 첫 순례를 다녀오고 나니, 종교인이 될 수 없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그 길을 다시 경건하게 걸어보고 싶은 마음이 꿈처럼 자리잡았다. 실전 경험도 있고, 들은 이야기도 많고, 전문서적(?)도 좀 읽고무식하고 용감했던 처음에 비하면 아는 게 얼마나 많아졌는지그런데 아는 건 때로는 병이 맞다. 아는 만큼 보이기도 하지만, 아는 만큼 욕망이 생기기도 한다. ^^


루르드를 지나 생장에서 끝나는 길Camino del Piemonte이 있다는 것. 보통 서쪽으로 생장Saint-Jean-Pied-de-Port까지 걸어 프랑스길로 들어서지만, 생장 가기 전에 나오는 올로롱생트마리Oloron-Sainte-Marie에서 남북으로 교차하는 아를길Camino de Arles을 따라 남쪽으로 방향을 틀면 아스프 계곡Vallée d'Aspe을 타고 솜포르트 고개로 피레네 산맥을 넘게 되고, 그 길이 아라곤길Camino Aragonés로 이어진다는 것. 아라곤길은 푸엔테 라 레이나Puente la Reina에서 프랑스 길을 만나게 된다는 것

오로지 산티아고까지 배낭 메고 걷고 살아 돌아오는 걸 목표로 달팽이의 속도로 경주마인 양 목적지를 향해 걷기만 했던 게 아쉬워 프랑스길을 다시 걷고는 싶었는데, 루르드와 아라곤 길을 알게 되어 루르드에서 시작해 아라곤길을 걷다 프랑스 길을 만나 걸으면 약간의 변주도 되면서 완벽하다 싶었다. ^^


루르드에서 솜포르트까지 걷는 것은 피레네 북쪽 산기슭을 따라 가다 솜포르트 고개로 산맥을 넘게 되니 피레네 산맥의 웅장함을 온전히 느낄 것 같았고, 순례자가 많지 않다니 조용히 걸을 수 있을 것 같아 좋았다.  아라곤 길은 생장-론세스바예스 경로가 안전하게 정착되기 전, 순례자들이 주로 이용하던 길이었다. 이베리아 반도가 이슬람 세력에게 점령되었을 때, 기독교도들은 아라곤 산악지역으로 피신해 그곳을 거점으로 삼았다. 그렇다 보니 당시 기독교 유적과 순례 관련 문화유산이 많이 남아 있고, 어떤 교회, 수도원, 마을은 꼭 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피스테라Fisterra 거쳐 무시아Muxía까지도 걸어 보고 싶었다. 무시아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기독교를 전도하다 실의에 빠진 산티아고를 위로하려 성모마리아가 돌배Barca de Piedra를 타고 천사의 호위를 받으며 나타났다는, 산티아고 전설 속 주요 장소인데 첫 순례 때 못 가서 항상 아쉬웠었다.


아무튼

스페인 경로는 별 걱정이 없었는데, 루르드-솜포르트 경로는 순례 인프라가 염려됐다. 방구석에 앉아 인터넷의 바다에 빠져 검색, 검색, 검색... 답정너, 원하는 답이 나올 때까지 검색... ㅋㅋㅋ 많이 다니지는 않아도 아예 안 다니는 건 아니고, 나름 생존 가능한 수준은 된다, 여의치 않으면 이용할 다른 숙박시설도 있다, 오지도 아닌데 택시가 없으랴여차하면 택시 타면 된다. [그런데 이제와 말인데, 택시가 없었던 적도…^^] 한국 사람의 경험담은 못 찾았지만 외국 사이트를 보니 걸었던 사람들이 있었고, 누구도 쉽다고는 하지 않았으나 그들이 했다면, 나도 조금씩 천천히 할 수 있겠지..할 수 없는 이유를 찾지 말고,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라고! 그게 내 신조이긴 한데, 이럴 때 보니 욕망을 합리화하기 위한 기적의 논리같기도... 합리화 대마왕의 예정된 결론... ^^  


이제 문제는 나라는 존재였다. 그렇게 걷자면 일정을 확 늘려야 하는데 감당할 체력이 되나? 내 안에 자리잡은 회귀 본능이 일정시간이 지나면 정체를 드러내며 아우성을 치는데, 과연 다스릴 수 있을까? 그럼에도 비대해진 욕망은 절제할 생각도 양보할 마음도 없었다. 인생 마지막 순례일 수 있어. 이번에 못하면 또 언제 해? 할 수 있다고!!! 그렇게 마음 한 켠에서 솟아오르는 두려움과 걱정을 어르고 달랬다.

무서워... 그런데 설마 죽기야 하겠어?

무섭다고... 죽겠냐고?

확률을 믿는 나... 그 길에서 죽을 확률과 죽지 않을 확률은?

그렇다면 결론은? ^^


그렇게 두 번째 순례의 경로가 결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