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에 필요한 모든 걸 등에 지고 800km를 걷는 산티아고 순례… 온갖 교통수단이 즐비한 세상을 사는 현대인에게 산티아고 순례는 사서 겪는 고난과 역경이다. 그렇기에 그 길을 다 걸으면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보상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기도 한다. 그 길을 두 번 걸어본 사람으로서 변화가 없는 것 같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드라마틱하게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 같지는 않다. 아무튼 그 길은 평생 걸은 사람에게 작용한다는 말이 있으니 그 말이 사실이길, 그리하여 내 삶에 계속 좋게 작용하길 바라는 본다. ^^
내가 내게 평생 간절히 바라는 게 있다면, 생각을 빨리빨리 실행에 옮기는 거다. 그럴 수만 있다면 모든 걸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게 안 된다. ^^ 평소보다 100배는 강한 의지로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야 하는 순례를 마치면 혹시 조금 실천적 인간이 될까 하는 기대가 있었는데, 역시
그런 인간이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 그렇다고 구제불능이라는 좌절(?)만 남은 건 아니다. 나는 나로 충분하다는, 말로 잘 설명이 안 되는 느낌적 느낌으로, 혼자 뭐가 좋은지 희죽희죽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서 돌아왔다고나 할까... ^^
그리고 하게 된 생각 중 하나. 길을 마치고 돌아가면 내 공간을 최선을 다해, 형편에 맞게 정돈하고 꾸미리라... 이 번에 길을 걸으며 유독 눈에 들어온 것은 최선을 다해 삶의 공간을 가꾸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공간은 영혼으로 가꿀 수 있는 게 아니다 보니 집안 마다 경제적 사정이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공간의 아름다움과 경제적 형편과는 비례하지 않았다. 형편껏, 상황에 맞게 최선을 다했고, 그 모습에 담긴 최선이 아름다워 보였다. 자신이 존재하는 공간을
가꾸는 건 포장용 치장이 아니라 삶을 소중하게 여기는 태도라는 게 느껴졌다.
그리하여 시작된 공간에 대한 생각... 물론 이전에도 실용성을 추구하며 정리정돈은 하고 살았다. ^^ 그런데 유용한 물건이 적절히 배치된 공간을 넘어 삶의 태도나 지향이 표현되는 공간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유행하는 신조어, 추구미... 그렇다면 내 추구미는 뭘까?
집을 꾸미는 게 언젠가부터 대유행이라 집꾸미기 컨텐츠가 넘쳐나고... 온갖
디자이너와 브랜드의 집기들을 자랑하는 건지, 소비를 부추기는 건지... 집은
돈으로 꾸미는 거라는 결론을 내는 듯한 인상이 들기도 했다. 그럴 돈도 없지만, 좋아 보이지도 않았다.
걸레를 손에서 놓지 않는 어떤 분의 공간처럼 소박하지만 반들반들 윤기나는 공간... 손때 묻고 낡았어도 인연이 닿은 물건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느껴지는 공간... 디자이너나 브랜드 이름이 아닌 안목이 보이는 공간... 오래 산 사람으로 오래 산 흔적이 보이는 공간... 내 역사와 내 지향이 담긴 공간...
내 추구미를 조금 구체화 하면 저 정도로 표현할 수 있겠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디킨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적이 있다는 증거를 발견했다. ^^
* * *
‘두 도시 이야기’ 속 Mr. Lorry의 눈에 비친 Dr. and Miss Manette의 집.
A quainter corner than the corner where the Doctor lived, was not to be found in London.
...
Simple as the furniture was, it was set off by so many little adornments, of no value but for their taste and fancy, that its effect was delightful. The disposition of everything in the rooms, from the largest object to the least; the arrangement of colours, the elegant variety and contrast obtained by thrift in trifles, by delicate hands, clear eyes, and good sense; were at once so pleasant in themselves, and so expressive of their originator, that, as Mr. Lorry stood looking about him, the very chairs and tables seemed to ask him, with something of that peculiar expression which he knew so well by this time, whether he approved?
* * *
quaint 정겨운, 독특하고 고풍스러운 매력이 있는...
of no value but for their taste and fancy 값나가지 않지만 안목과 개성이 담긴...
thrift in trifles 사소한 것에 낭비하지 않는, 분별 있게 소비하는...
expressive of their originator 주인의 성품이 보이는 ...
통했다, 디킨스랑... ㅎ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