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7/2021
산티아고 길: 템플 기사단
산티아고 길을 걷다보면 그리고 관련된 책을 읽다보면 성전 기사단이라고도 하는 템플 기사단Knights Templar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그들이 지었다고 하는 성과 교회, 그들의 영지였던 마을, 그들의 마지막 그랜드 마스터의 이름을 딴 바, 그리고 그들의 드라마틱한 종말 등등...
그래서 찾아봤더니 그들은...
1119년 예루살렘에서 설립한 기독교 무장 기사단. Poor Knights of Christ, Poor Knights of the Temple of Solomon이라는 이름도 있다. 원래 목적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순례자들을 보호하는 것이었는데, 차츰 군대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부와 명예가 쌓이자 경쟁자들의 질시를 받게 되었고, 신성 모독의 누명을 썼고 예루살렘 왕국 멸망의 책임이 지워졌다. 그리고 1307년 프랑스의 필리프 Philippe 4세에 의해 해산되었다.
1차 십자군 전쟁(1095-99)이 성공적으로 끝나 십자군 국가들이 세워졌지만 영토를 안전하게 지킬 여력이 없어 예루살렘 순례자들은 여전히 무슬림의 습격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을 안타깝게 여긴 Hugh de Payns가 이끄는 8~9명의 프랑스 기사들은 예루살렘 왕국의 왕 Baldwin II을 찾아가 순례자들을 보호하는데 헌신하겠다는 서약을 하고 1119년 종교 단체를 만들겠다 제안했다. Baldwin II는 제안을 받아들였고 솔로몬 신전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왕궁의 부속건물을 내어주었다. 이 사실에서 그들의 별명 중 하나가 유래했다.
그들은 세속적 종교적 지도자들의 지지를 얻어 많은 후원금과 특권을 받았다. 대표적으로 1139년 교황 Innocent II는 그들의 예배당을 지을 권리와 십일조를 내지 않을 권리를 주고, 주교의 관할구에 속하지 않고 교황 직속 조직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수도사와 같은 단체 생활을 했으나 엄격히 수도원에 묶여있지는 않았고, 기사 대부분 교육을 받지 못해 라틴어를 읽지 못하니 수도사들처럼 성서를 읽어야 할 의무는 없었다. 대신 그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싸우는 것이었다. 그들은 순례자 보호를 넘어 십자군 국가들을 방어하는 것으로 임무를 확장하고, 주요 마을에 성과 요새를 짓고 전투에 참가했다.
템플 기사단은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스페인, 프랑스, 영국의 왕들은 그들을 영주로 만들고 영지를 하사했다. 12세기 중반에는 서유럽, 지중해 연안, 예루살렘 등에 영지를 지니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네트워크, 수송능력, 군사력 등을 이용해 순례자들과 왕들의 은행가 역할을 했다. 그들은 일종의 어음을 발행했다. 그들이 발행한 증서를 그들의 다른, 일종의 지점에 보여주면 현금을 지불해 주는 형식이었는데, 최초의 어음으로 일컬어진다.
그들은 비슷한 시기에 생긴 구호기사단과 경쟁관계에 있었다. 13세기 말 두 기사단을 합치자는 의견이 있었다. 1291년 예루살렘 왕국의 마지막 요새 Acre가 무슬림의 손에 들어가자 막강한 부와 영토와 세력을 가진 그들의 존재 이유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 1304년경 기사단의 전 멤버가 신성 모독과 부도덕성을 이유로 고발당했고, 1307년 10월 13일 금요일 필리프 4세가 프랑스에 있는 기사단원을 모두 체포하고 재산을 모두 압류하라는 명을 내렸다. 기사단의 기행에 대한 소문은 널리 퍼져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미 그들의 혐의를 알고 있었다. 그들은 이단, 부도덕성, 우상 숭배, 고양이 숭배, 동성애, 비밀스러운 입단 의식을 비롯해 다른 많은 잘 못된 신앙과 의식을 거행한다는 판결을 받았다. 필리프 4세는 무자비하게 그들을 잡아 고문해서 거짓 자백을 받아 냈다. 현재 이런 죄목은 근거가 없었고, 이단, 마녀, 악마 등에 대한 당시의 공포를 일으키기 위해 계산된 것이었다고 인정되고, 이 사건에서 13일의 금요일에 저주가 걸려있다는 미신이 비롯됐다.
필리프 4세가 템플 기사단을 파멸시킨 이유는 명확하지 않지만 그들의 힘에 대한 두려움이나 그들의 부를 손쉽게 빼앗기 위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당시 프랑스 출신 교황 Clement V도 같은 해 11월에 템플 기사단원을 체포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죄를 고백하고 인정한 사람들은 그들의 옛 집이나 수도원이나 살게 해주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재판에 넘겨졌다. 기사단의 단장 Jacques de Molay는 교황이 만든 위원회에서 무기 징역의 형을 받았으나 끝내 죄를 인정하지 않고 화형을 당했다.
교회 내부에서도 템플 기사단의 탄압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었고, 프랑스를 제외한 다른 나라에서는 무죄로 인정되었다. 하지만 교황은 필리프 4세의 압력에 굴복해 기사단을 탄압했고, 유럽 전역에 있는 재산을 구호기사단이나 그 나라의 왕에게 넘겼다.
당시 템플 기사단은 유럽과 예루살렘 일대에서 매우 중요한 조직이었고 근거 없는 믿음과 전설의 대상이었다. 최후의 만찬의 성배의 수호자로 여겨졌었고, 18세기 프리메이슨은 그들의 비전의 지식을 물려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들은 또한 영지주의자들로 알려져 있고, 프랑스 혁명의 배후에 그들이 있었다는 설 등 많은 음모론에 등장하기도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