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6/2021

산티아고 길: 성인의 매장과 무덤의 발견



매장

산티아고를 참수한 헤로드 아그리파는 그가 예루살렘에 묻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몇몇 기독교도(혹은 제자들)가 (시신을 몰래 빼내) (당시 땅 끝으로 알고 있던, 마법과 신비의 땅 피니스테레에 매장하길 원해) 성인의 시신을 무인(Athanasius, Theodore 두 제자가 함께 탔었다는 설도 있다) 보트(대리석 배였다는 설도 있다)에 실어 보냈는데, 한 천사가 보트를 이끌어 바다를 건너고 당시 Roman Galicia의 수도였던 이리아 플라비아 Iria Flavia로 향하는 Ulla 강을 따라 Mount Libredón (현재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이르게 해서, 산티아고는 그곳에 묻혔다고 한다.

성인의 매장에 관련된 다른 전설도 있다. 배가 갈리시아 해안에 닿았고, 그의 시신이 도착하리라는 것을 겨우 알고 준비 없이 해안에서 기다리던 제자들이 유해를 내려 커다란 바위에 놓으려 하자, 바위가 즉시 신성한 유해를 안치하기 좋게 굽었다. 제자들은 산티아고를 묻을 장소를 널리 찾다 결국 그 지역 여왕인 루파Lupa의 궁전에 찾아가 매장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들의 요청이 내키지 않던 여왕은 여러 번 제자들을 시험했지만, 그들은 매번 기적같이 시험을 통과했다. 마지막으로 인근 산에 사는 두 마리의 사나운 황소에게 멍에를 씌우면 자신의 땅을 허락하겠다 약속했다. 그런데 시체의 신성함을 이미 아는 두 황소는 얌전히 멍에를 씌우게 허락했고, 제자들은 성 야고보의 유해를 한 언덕에 묻게 되었다.

무덤의 발견

산티아고는 813년에 다시 이베리아 반도에 다시 떠올랐다. 당시의 상황은 성인의 매장은 이후 오랜 기간 동안 잊혀졌고, 이베리아 반도는 로마에 이어 서고트족이 지배하에 기독교화되었는데, 서고트 왕국은 북아프리카에서 온 이슬람 세력에 의해 멸망하고(711), 기독교 세력은 이베리아 반도 북서쪽 산악지대(아스투리아스 왕국)와 피레네 산맥이 있는 동쪽으로 몰린 상태였고, 이슬람 세력에 대한 산발적 저항과 국토회복 운동(722~1492)이 벌어지고 있었다.

당시 사건으로 유명한 것은 778년 샤를마뉴 대제가 사라고사에서 아랍세력의 진출을 막으려고 피레네 산맥을 넘었던 사건이다. 샤를마뉴 대제는 바스크족의 근거지인 팜플로나에 해를 입히지 않겠다는 약속 하에 스페인으로 들어왔으나, 돌아가는 길에 약속을 지키지 않고 팜플로나의 성벽을 무너뜨렸고, 그래서 바스크족은 샤를마뉴의 군대를 쫓아가서 론세스바예스의 전투가 벌어졌던 것이고, 후미를 지키던 샤를마뉴의 조카 롤랑의 군대가 바스크족에게 대패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은 롤랑의 노래라는 서사시로 남게 되었다.

813년(우리나라는 발해와 신라가 있던 시절) Pelayo라는 목동[또는 은둔자]이 별을 따라 들판으로 안내되어 한 무덤을 발견했고, 그 안에서 세 명의 유해와 양피지가 나왔다. 그는 당시 Iria Flavia 주교 Teodomiro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주교는 유골이 산티아고와 두 제자 아타나시오(Atanasio)와 테오도로(Teodoro)의 것이라고 선언하고 당시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왕 Alfonso II에게 알렸다. (당시 갈리시아는 아스투리아 왕국 Kingdom of Asturias의 영토였다.) 알폰소 2세는 직접 무덤을 확인했고, 교황에게 산티아고의 무덤이라는 인정을 받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 교회를 건설하라는 명을 내렸고 산티아고를 아스트리아스 왕국의 수호성인으로 지정했다. 그리고 그곳은 별의 들판Campus Stellae라고 불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