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2/2019

시칠리아 여행: 그 후 4일째, 비빔밥




다른 나라 음식도 잘 먹는다. 다만 고수를 비롯한 향신료에 약해서 향만 강하게 쓰지 않는 곳이라면 어디든 김치 먹고 싶다 하지 않고 잘 먹고 지낸다. 그런 자신감에 근거해서 여행길에 고추장 튜브 하나, 믹스커피 하나도 안 챙긴다. 그렇다고 현지식만 고집하지 않는다. 한식당이 있으면 가기도 하고, 오랜만에 먹으니 너무 맛있다며 엄청 잘먹는다.

외국 중 이탈리아는 더 걱정이 없다. 음식도 웬만큼 알고, 메뉴판도 웬만하면 읽을 수 있고, 치즈, 생 햄은 아무리 먹어도 질려 하지 않는다.


오는 비행기에서 내리기 전 아침 식사를 준다. 살구 쨈이 든 크루아상, 빵, 생 햄, 치즈 등. 보기에는 모두 별로다. 크루아상은 한 입 먹으니 더는 못 먹겠다. 드디어 식욕을 잃었나 싶어 기뻤다. 그런데 안 먹으면 다 버릴 것이라 생각하니 너무 아깝다. 아프리카 여행 후 먹을 수 있는 것을 버리는 행위에 대해 생각이 많아졌다. 빵을 갈라서 버터 바르고 생 햄과 치즈 넣어 샌드위치나 만들어 볼까 싶었다. 한 입 먹으니 웬걸... 잃었다고 기뻐했던 식욕이 순식간에 돌아왔다. 너무 맛있다. 어떻게 이것은 이 상황에도 맛있냐 하며 끝까지 다 먹었다.


이탈리아 식재료에 대한 내 유난스러운 사랑에도 불구하고 이번 여행에서는 유난히 채소가 고팠다. 샐러드로 먹는 생 채소 말고 우리 식 채소 음식이 그리웠다. 나물, 찌개, 국, 조림...


멸치 넣고 조린 꽈리고추 조림에 흰 쌀밥 한 숟갈 먹는 장면이 뜬금없이 떠오른 적도 있었다. 꽈리 고추 조림은 좋아하긴 하지만, 흰 쌀밥은? 흰 쌀밥을 먹는 일이 거의 없는데... 여행 막바지에는 나물 듬뿍 든 비빔밥이 자주 먹고 싶었다. 채소가 이렇게 싸고 흔한데, 이런데서 비빔밥 집 하면 대박일 텐데... 그리고 비빔밥에 꼭 무 생채가 들어갔으면 좋겠었다. 나도 모른다, 내 바람의 출처를. 그냥 그랬으면 좋겠었다.


동네에서 제대로된 비빔밥 먹을 곳이 떠오르지 않는다. 만사가 귀찮아도 비빔밥은 먹어야 했다. 여독으로 무거운 몸을 이끌고 장을 봐서 직접 만들었다, 채소 듬뿍 넣은 비빔밥을. 무 생채도 듬뿍...


P.S.
그렇게 이탈리아 음식 좋다고 맛있다며 먹을 때는 언제고, 오자마자 해독을 해야 한다며 해독쥬스를 만들려 브로콜리 사다 시칠리아가 너무 그리웠다. 거기에서는 믿거나 말거나 내 머리통만한 브로콜리가 1유로였는데, 중국산 주먹보다 조금 큰 브로콜리가 천오백 원이다. 심지어 곰팡이가 피고 있는 것도 팔았는데 980원이었다. 국내산은 그야말로 보통 어른 주먹만한 것이 사천원에 가깝다. 양파는 수확도 안하고 엎어버린다는 뉴스를 몇 달 전에 들은 것 같은데, 작은 것 예닐곱 개 쯤 든 것이 삼천원. 농수산물이 이렇게 비싼 나라는 아직 못 봤다. 수익이 생산자에게 노동의 댓가만큼 적절히 돌아간다면 바싸다고 투덜거리고 싶은 생각은 없는데, 얼마전 TV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소매도 아니고 도매로 삼천원에 팔리는 배추를 농부는 이백오십원에 유통업자에게 넘겼단다. 소매 가격은 도매의 두 배쯤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유통이 농부들의 시간과 노동의 열배 심지어 스무배의 부가가치를 창출한다고??? 이런 시스템을 시칠리아 사람들은 바로 마피아 식 mafioso이라고 하지 않을까...